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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Aug 24. 2018

세비야의 밤

SPAIN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8시간의 야간 버스 탑승. 세상에 수많은 야간 버스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나 도시별로 버스의 시설이나 운행 조건이 천차만별이겠지만 우리가 이용한 야간 버스는 그야말로 '지옥행' 버스였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저녁 9시 30분에 출발해 스페인 세비야에 새벽 5시 30분에 도착하는 여정. 시간이 길어 고생스러우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비행기에서 자듯이 눈을 감았다 뜨기를 몇 번 반복하면 금세 도착할 줄 알았다. 하지만 버스의 좌석은 성인 여성이 앉기에도 작았고, 간격이 너무나 좁아 다리를 펼 수도 없었다. 앞뒤로 앉은 일부 승객들은 좌석의 기울기를 조정하는 일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모두가 불편했고, 예민했다. 잠은 제대로 못 잘게 뻔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창밖을 보자 절망스러웠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므로 결국 버스는 국경을 넘어 세비야에 도착했지만, 숙소 체크인은 3시는 되어야 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엔 기차역에서 노숙을 했다. 스페인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Seville


 기차역 대합실 의자에 몸을 누이고 캐리어를 보조의자 삼아 다리를 펴니 조금은 살 것 같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간 버스에서 몸을 있는 대로 구긴 채 끔찍한 시간을 보냈으므로 이 정도면 천국이다. 대합실에 흐르는 공기는 새벽녘의 침묵처럼 고요했다. 우리 말고도 집채만 한 배낭을 멘 두 명의 여행자와 어쩐 일로 이 시간부터 와 있는지 모를 사람들이 있었다. 몇몇은 잠을 청했고, 나머지는 뉴스를 보고 있다. 뉴스에서는 바르셀로나 시위 현장을 다루고 있어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카탈루냐의 독립을 둘러싸고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립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어 걱정스러웠는데, 사실인가 보다. 아침 뉴스에서도 연신 보도되는 것을 보면. 며칠 뒤면 바르셀로나에 갈 건데, 부디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피곤을 이길 수 없었다. 나는 결국 밖으로 나와서 기다란 벤치에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웠다. 그리곤 얼마 가지 않아 곯아떨어졌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머리 위로 여러 번 지나간 것 같은데, 꿈결같이 아득하기만 하다.

 

 숙소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체크인 시간까지 쉬다가 가기로 해서 기차역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바쁘게 출근하는 세비야의 직장인들을 보니 아침이 온 것이 실감 났다. 저들에게는 한 손으로 커피를 든 채 걸음을 멈추고 신문을 사는 것이 일상인 듯 싶었다. 조금 더 걸으니 세비야 대학교가 나왔고, 스페인 광장이 보였다!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한잔 시킨 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비야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마차 관광이 유명하다더니, 이른 시간부터 돌아다니는 마차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조금 더 쉬다가 Sevilla Kitsch Hostel Art 숙소에 짐을 맡기고 스페인 광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크고 안달루시아의 주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작은 마을의 모습과 흡사했다. 높거나 현대적인 건물이 하나도 없었고, 예스러운 거리의 풍경이 정다웠다. 스페인 광장은 극장식 반원형 건물의 형태로, 58개 도시의 휘장과 지도, 역사적 사건들이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중세 유럽과 이슬람식 건축이 묘하게 어우러져 깊은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시야가 확 트이는 광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먼저랄 것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사실 그동안 한번 집을 나서면, 낮잠을 자기 위해 돌아왔던 적은 없었다. 좀 더 많이 보고, 많이 누리기 위해 바쁘게도 돌아다녔다. 매 순간이 너무도 소중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낮잠은 사치였달까. 야간 버스를 계기로 여행 23일 만에 처음으로 충전의 시간을 보냈다. 밤이 돼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온몸의 긴장이 풀려 너무나 개운했다. 마침 호스텔에서는 8시부터 루프탑 파티가 열린다고 해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친 후, 말끔한 차림으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보랏빛 조명이 가득했던 옥상엔 역동적인 뮤직비디오를 틀어 놓았다. 현대미술을 콘셉트로 하는 호스텔이라 곳곳에 위트 넘치는 그라피티가 가득했다. 파스타와 샹그리아로 주린 배를 채우고 나니 세상이 다시금 아름다워 보였다. 흥이 나서 밤 산책을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은희가 함께 나서 주었다. 세비야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거리로 나아가니, 늦은 시간에도 유동인구가 꽤 많았다. 플라멩코를 비롯한 각종 길거리 공연도 펼쳐지고 있었다. 귓가에 흐르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밤의 거리를 거닐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Maquila


 Maquila는 캐주얼한 콘셉트의 타파스 바다. 스페인 하면 타파스를 빼놓을 수 없으므로! 시작은 가볍게 과카몰리와 수제 맥주 두 잔을 시켰다. 맥주의 종류가 많고 이름만으로는 어떤 맥주인지 파악할 수 없으므로 바텐더에게 추천받기를 권한다. 우리도 주문을 받는 분께 여쭈어 보니 시음용 맥주를 몇 잔 건네주셔서, 직접 마셔보고 정할 수 있었다. 시트러스 향이 가득한 맥주와 아보카도를 듬뿍 얹은 나초는 환상의 조합이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면 한 달에 한 번은 꼬박 갔을 거다. 다음날 저녁에 넷이서 다시 한번 찾아갔고, 타파스와 맥주 그리고 디저트까지 다양하게 주문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타파스를 많이 시킬 수 있으니 마치 잔치상 같은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소고기 요리, 누들, 치킨, 튀김만두는 모두 한국인의 입맛에 꼭 맞는 간으로 조리되어 정말 맛있었다. 아주 새로운 맛은 아니나 자꾸만 젓가락이 가게 하는 맛! 아무래도 스페인 요리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가장 잘 맞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주문한 'Spicy chocolat hot muffin'은 말 그대로 통통 튀는 독특한 맛이었다. 'Spicy'라는 이름은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알갱이 때문에 붙인 것이었다. 약간은 충격적이었지만 이 타파스 바를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디저트였다.



Palo Cortao Vinos y Tapas


세비야에서 인생 맛집을 찾았다. 세비야 대성당 인근에 위치한 Palo Cortao는 맛, 분위기, 가격 모두 만점이었다. 테이블이 3개밖에 없는 작은 식당이라 식사 시간에 맞춰 가려면 예약이 필수겠다. 우리는 다행히 느지막한 오후에 찾아갔기에 기다림 없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식사 메뉴의 가짓수는 일반적인 레스토랑과 같았지만, 와인의 종류는 무려 수십 가지나 되었다. 이곳도 역시나 직원의 추천을 받아 보기를 권한다. 우리는 이베리아 흑돼지의 뒷다리로 만들었다는 이베리코 하몽과 등갈비, 연어 수프 그리고 문어 요리를 시켰다. 요리마다 돋보이는 섬세한 플레이팅에 감탄을 하기도 잠시, 맛을 보고 나면 박수가 절로 나온다. 도대체 무슨 맛인가 싶게 새롭지만 몇 번 먹다 보면 정감이 간다. 문어 요리는 금방 동이 나서 한번 더 시켰다. 절대 질리지 않을, 훌륭한 수준의 맛이었다. 하나같이 정말 맛있어서 또 오고 싶었지만 마지막 날에 발견해서 그러지 못했다. 세비야를 다시 오게 된다면 무조건 가장 먼저 이곳에 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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