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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Sep 06. 2018

파리지앵과 함께 살기, 카우치 서핑

FRANCE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여행의 첫발을 내디뎠던 도시에서 이제는 끝매듭을 짓기 위해. 두 번째로 만난 파리에는 어느덧 새로운 계절의 냄새가 났다. 앙칼진 바람은 폐부를 가차 없이 찔러댔고, 해는 자꾸만 짧아졌다. 황막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이 틀림없다. 여정이 끝나간다는 현실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데다 깊은 무력감마저 들었다. 나의 현재 상황도, 기분도 좋지 못하기에 요 며칠이 무채색으로 갈무리되는 것인가 싶었다. 나는 여행의 말미에 의욕과 방향성을 모두 잃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Gwen과 Marie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나를 구원하러 온 천사였다.


Gwen&Marie


 파리지앵 Gwen과 Marie를 만나게 된 건 '카우치서핑' 덕분이었다. 지현이가 곧 포르투갈로 떠나면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될 예정이었는데, 그러면 더욱이 여행의 의지를 잃을 것 같았다. 사실은 경제적 요인도 한몫했다. 모아둔 돈은 진즉에 다 썼고, 몇 주 전 가족들에게 받은 것마저 떨어져 갔다. 숨만 쉬려고 파리에 온 것은 아니지만 집에 돌아갈 때까지 최대한 아껴 써야 했다. 그러다 문득 카우치서핑이 떠올랐다. 유럽에서는 카우치서핑은 물론 에어비앤비, 블라블라카와 같은 공유경제 기반의 서비스 이용이 굉장히 만연했다.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도전하지 않은 카우치서핑을 해보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숙박비를 해결할 뿐 아니라, 좋은 친구도 사귈 수 있지 않은가.


 게스트 등록을 위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파리에 있는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에 10통 이상 보낼 수 없어서 우선은 보내 두고 기다리기로 했다. 역시나 호스트들에게 승낙을 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프 농가를 구할 때에도 이미 숱한 거절을 당했지만 카우치 서핑은 더 만만치 않아 보였다. 어쨌든 기본 원칙은 집에 남는 공간을 아무 대가 없이 숙소로 제공하는 것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호스트와 게스트 모두 신중한 고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틀에 걸쳐 스무 통 정도의 메시지를 보냈을 때, Gwen에게 답이 왔다. 내가 Gwen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써놓은 자기소개 때문이었다. 그는 카우치서핑을 이용해 한국을 여행했었고, 그때의 기억으로 인해 자신도 카우치서핑 호스트가 되었다는 거다.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를 나누고, 대화를 하는 시간이 그리워서. 여자친구 Marie와 함께 살고 있어 그녀의 안전을 위해 여자 게스트만을 받는다고도 적혀 있었다. 글을 읽고 나자, 그가 나를 받아준 이유가 짐작이 갔다. 참운이 따랐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Gwen은 놀랍게도 내가 머물기로 약속한 날보다 하루 먼저,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마침 지현이가 떠나기 전날이라 오후 일정을 딱히 정해두지 않았다. 우리는 몽마르트르 근처의 마트에서 마들렌을 사서 그의 집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서 신사처럼 보이는 모자를 쓰고 있던 그는 사진 속 모습 그대로라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자연스레 비주를 건넸다. 에펠탑 근처에 위치한 그의 집은 깨끗한 아파트였다. 내부 구조가 전형적인 한국 아파트 같아서,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멀뚱히 서있는 우리를 보고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 곧이어 한국산 전통 다기와 하동 녹차를 내어오더니, 익숙하게 차를 내리고 찻잔에 따라 주었다.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에서 '다도'를 직접 보고 배웠다고 했다.

 

 Gwen은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직업은 ‘비교문화 심리학자’이면서 ‘영화 칼럼니스트’였다. 요즘 진행 중인 연구 주제는 ‘한국 여성들의 삶’이라서 앞으로도 많은 여성을 만나 인터뷰를 할 거라고 했다. 그는 매년 파리에서 열리는 한국영화제에 취재차 참석하고 있고, 올해엔 <택시운전사>의 장훈 감독을 인터뷰하고 기사를 썼다고 했다. 이 사람, 범상치 않다. 한국과 일본에 관심이 굉장히 많고, 동양 문화를 폭넓게 잘 알고 있으며, 여행 경험도 풍부하다. 한국인 친구가 많다는 건 그의 집을 언뜻 둘러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한국인 친구들과 찍은 사진과 편지가 집안 곳곳에 있었고, 한글로 된 책, DVD, 음반, 잡지(심지어 나도 처음 보는 독립 서적도 있었다) 등 없는 게 없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그만의 특별한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일화 속에 녹아있는 다재다능한 면모에 놀라다가도 우리보다 더 한국인 같은 말을 할 때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티 타임은 어느덧 와인 타임으로 변했고, 안주는 잘 익은 김치였다. 유럽에서 먹은 김치 중에 제일 맛있었다. 너무 좋아서 젓가락질하는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저녁 시간이 되자 Marie가 왔고, 그녀도 우리와 비주로 인사한 후 자연스레 대화에 동참했다. 한두 시간 머물다 가려고 했는데, 그들은 저녁을 함께 먹고 가는 게 어떻냐고 했다. 마리가 가장 좋아하는 크로크 무슈(Croque Monsieur)를 만들어주겠다며! 사실 속으로는 백번 예스를 외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얻어먹은 게 미안해서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인들이 예의상 거절하는 문화'까지도 알고 있는 세미-한국인이었다. 우리에게 편하게 생각해도 된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더니 빵 위에 햄과 치즈, 계란 프라이를 얹은 크로크 무슈를 만들어왔다. 거기에 샐러드와 상큼한 사과주인 시드르(Cidre)까지. 맛은 일품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일 올 때 뭐라도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이렇게 한 치 앞을 모른다!



 Gwen과 Marie는 정말로, 남다른 사람들이었다. 나를 게스트로 받아준 것만 해도 너무나 고마운데 말 한마디 한마디 그리고 행동 하나 하나로 내 마음을 녹였다. 갑자기 추워진 파리의 날씨에, 그들은 외출하려는 나를 붙잡더니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를 건넨다. 그 와중에 옷장을 활짝 열어 제일 마음에 드는 외투를 골라보란다. 내가 괜찮다고 손사래를 쳐도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며. 그들은 나를 동생 다루듯 살뜰히 챙겼다. 원래 이 집의 기본 원칙은 Gwen과 Marie의 출근 시간에 맞춰서 나갔다가, 그들이 퇴근한 이후에 들어오는 거다. 때문에 나는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집 옆의 스타벅스로 갔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Gwen에게 카톡이 왔다. 날씨가 추운데 너무 이른 시간에 나를 밖으로 나오게 한 거 같아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내일부터는 집 열쇠를 줄 테니 내가 원하는 시간에 왔다 갔다 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세상에. 집 열쇠를 맡길 정도로 나를 믿는다는 걸까. 고맙기도 하고 괜히 미안했다. 나는 청승맞게도 메시지를 읽는 순간 뭉클해져서 그 자리에서 울었다.

 

 그들은 내가 낮에 혼자 돌아다닐 때도 계속 안부를 물어왔다. 뭐 하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언제 들어올 계획인지. 이런 따뜻한 사람들을 봤나. 저녁은 꼭 함께 먹자며 시간 맞춰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Gwen과 Marie 덕에 매일 저녁마다 라끌렛, 파이, 쏘시쏭 등의 프랑스 가정식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그들의 호의를 아낌없이 받자, 나도 베풀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밤 들어가기 전 조그만 선물을 사 갔다. 그랬더니 Gwen은 오늘은 또 뭘 바칠 거냐며, 농담을 던진다. 한 번은 Marie가 좋아한다고 했던 마카롱을 사 갔더니, 그 자리에서 나눠먹자고 해서 나도 먹어보았다.


 그들은 내가 원한다면 지현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 집에 더 머물러도 된다고 했다. 무려 일주일이나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주간 Gwen&Marie 하우스에서 살았다. 같이 지내다 보니 각자가 지니고 있는 매력적인 면모가 보였다. 우선 Gwen은 말이 많고, 재밌고, 특유의 시니컬 조크를 날린다. Marie는 말수가 적지만 호기심이 많고, 온화하다. 두 사람이 왜 오랜 연인인지 알 것 같았다.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이따금씩 Gwen과 Marie가 불어로 얘기할 때, 나는 그걸 듣는 게 좋아서 말을 아끼기도 했다.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우리는 서로에 관해 더 깊이 알게 됐다. 각자의 인생 이야기는 물론 가족들 이야기도 하게 됐는데, Marie의 고향이 나의 친언니가 교환학생으로 있었던 Quimper와 같은 지역이었다. 나름의 공통점이 있어선지 가족들에 관한 소소한 부분까지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 Marie의 언니 결혼식 동영상을 같이 보았고 Gwen의 가족들이 남긴 오래된 사진도 보게 되었다. 파리의 옛 풍경 속 환희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사진은 순간을 영원히 붙잡는 힘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 저녁에는 프랑스 정통 게임을 하고 놀았고, 또 다른 날엔 한효주 주연의 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보기도 했다. 매일 식구처럼 저녁을 먹고, 가족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우리는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다정한 포옹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은 단 한순간도 느낄 수 없었다. 속 깊은 배려 덕분에 나는 그들의 일부로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었다. 참으로 건강하고 따스한 시간이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사랑을 건넨 대상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도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바라지 않는 사랑’을 주고 싶다. 어쩌면 그들이 베푸는 호의가 세상을 선순환해서 이 지구에 온정이 가득 해지는 게 아닐까. Merci beaucoup et a bientot, Gwen&Ma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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