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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Dec 21. 2018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 <그린 북>

La vita è un film

*브런치 무비패스로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진 출처는 Daum 영화 ’그린 북’입니다.


'인종차별'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 한편이 아리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는다니? 스스로 원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게 아니듯, 그저 태어난 대로 살고 있을 뿐인데. 수세기 동안 인종차별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 지구 상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지 않을까. 나 또한 인종차별을 당해봤다. 유럽여행의 달콤한 기억 속에 분명 웃지 못할 경험으로 남아있는 그것. 이틀 걸러 한번 꼴로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 거리를 거닐면 불특정 다수의 무리가 조롱 투로 말을 걸었고, 별안간 이상한 소리를 내며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자리를 피하기 급급했고, 못 들은 척할 때도 많았다. 과연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런 건가? 혹은 여자라서? 어린애라서?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답을 구할 수도 없었다. 당해본 자만이 안다고, 참으로 서러웠고 마음속 응어리로 남았다. 영화 <그린 북>의 배경인 1960년대 미국은 인종차별이 만연한 사회다. '유색인종'이라는 표식으로 편을 가르고, 대놓고 차별한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인종차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하는가.  



<그린 북>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와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이다. 두 사람은 생각, 행동, 말투, 취향까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구역의 주먹왕은 나야'식 인생을 살아가는 토니는 거칠고, 투박한 사람이다. 반면에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바르고 우아하며 교양이 넘친다. 돈 셜리가 토니를 운전기사로 고용하면서 두 사람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다. 영화는 각각의 인물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토니와 돈 셜리가 미국 남부로 투어 공연을 떠나면서 우정을 쌓아 나가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두 사람이지만 서로를 알아가면서 점차 가까워진다.


투어를 떠나기 전, 토니는 돈 셜리를 위한 그린북을 받게 된다. 그린 북은 유색인종을 위한 여행안내책자다. 책자에는 흑인들이 여행하면서 안전하게 식사를 하고 머무를 수 있는 레스토랑과 호텔의 정보가 담겨  있다. 당시 미국, 특히 남부지방의 인종차별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돈 셜리 역시 '초대받은 피아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저급한 대우를 받고, 레스토랑 입장을 거부당하며, 화장실도 못 쓰게 한다. 오로지 인종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함부로 대하는 백인들의 모습은 경악스럽기 짝이 없다. 토니도 처음에는 돈 셜리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있는 그 자체'의 사람으로 대한다. 나중에는 둘도 없는 편이 되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정의를 구현한다.   



돈 셜리의 인종차별 대응방식은 그간 내가 생각한 것과 매우 달랐다. 그는 수많은 인종차별을 경험하면서도 절대 품위를 잃지 않는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단단한 태도를 유지하며 존엄을 지키는 것이다. 인종차별을 당하면 호되게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드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을 이어 나간다. 그가 이렇게 남부 투어를 감행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는 인종차별 따위(?)에 지지 않고, 품위 있게 맞선다. 인종차별을 행하는 사람이 무지한 것이니, 당하는 사람이 열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세상을 바꾸기 위한 행동은 멈추지 않고, 희망을 놓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한 소설이 자연히 떠올랐다. 한창훈의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이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음 세대를 살아갈 인류가 지녀야 할 태도가 명확히 담겨 있다.


어느 날, 섬나라 사람들은 법을 만들기로 한다. 그러자 각종 의견이 쏟아졌고, 모두들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했다. 결국 법이 너무 많으면 헷갈리기 쉬우니 딱 하나만 만들기로 한다. (중략)


드디어 그들은 법을 만들었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낮지 않았다. 그들은 그 법이 마음에 들었다. 아침에 만나면 서로 손을 뻗어 어깨에 대는 것으로 인사를 했다. 그 인사는 ‘저는 당신보다 높지 않습니다’라는 뜻이었다. 아무도 법을 더 만들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생선을 잡고 열매를 주워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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