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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Sep 19. 2020

마음이 머무는 장소, 하은재

서촌

What  하은재(losthouse)  

Where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68-10

Detail  https://booking.stayfolio.com/places/losthouse

Mood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은 이들을 위한 곳


건축가 김광현의 책 <거주하는 장소>를 읽다가, 한 문단을 읽고 잠시 멈추어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마음이 머무는 장소’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마음이란 ‘그 장소에 사는 사람,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 그곳에 앉는 사람, 그곳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을 뜻한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집 이외에 '마음이 머무는 장소'가 따로 있다. 바로 북촌 한옥마을이다. 회사가 북촌에 위치해 점심시간마다 그곳을 산책한다. 날이 좋을 때면 서촌이나 익선동까지 나아간다. 어딜 가도 한옥을 품고 있어, 고아한 정취가 따라붙는 동네들이다. 나는 계절마다 변화하는 한옥 마을을 거닐며, 일상을 유지할 힘을 얻곤 한다.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 기대는 그 순간이 내겐 더없이 소중한 이유다.


지난주에 휴가를 내고 서촌에 위치한 한옥집 ‘하은재’로 향하는 내내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간 한옥의 곁을 맴돌기만 하다, 비로소 하룻밤을 지내게 되다니! 나는 실핏줄처럼 이어진 익숙한 골목길을 지나쳐, ‘한권의 서점’에 도착했다. 서점에서 체크인을 하는 이유는 ‘하은재’가 서촌유희 스테이에 포함되어 있어서다. 서촌유희는 “수평적 마을호텔”이라는 슬로건 아래, 숙박객에게 한옥 스테이와 더불어 로컬 기반의 문화를 연계해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름처럼 한 권의 책으로 가득한 서점에서 숙소에 관한 안내 사항을 듣는데, 독특한 두 가지를 건네받았다. 하나는 서촌의 골목길이 담긴 지도였고, 나머지는 잠옷이 담긴 에코백이다. 익숙한 장소로만 느껴졌던 서촌이 여행지가 된 것만 같았다. 괜히 이 지도를 보면서 숙소까지 걸어간 다음, 도착하자마자 몸의 긴장을 풀어줄 잠옷으로 갈아입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골목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갈수록, 고요함이 한 겹 한 겹 더해졌다. 마침내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이곳이 왜 '하은재'로 불리는지 이해가 되었다. 세상으로부터 숨어든 자의 집에 대한 다산 정약용의 은자의 거처를 참고하여 '하은재(下隱齋)'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 정말로 이곳은 고즈넉한 적요 속에 잠겨 있었다.  


하은재는 'ㄱ자' 구조로, 마당과 침실, 다이닝룸, 영화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먼저, 마당은 시골집에 놀러 온 듯한 정겨움이 가득했다. 기와 벽을 감싸고 오르는 담쟁이넝쿨과 툇마루 아래의 놓인 고무신을 보니, 서울의 도심 한복판이라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소담한 중정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으로 다이닝룸이 있었다. 스테이폴리오 숙소의 부엌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여유의 시간'을 선사하는 물건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갈한 인테리어와 요리를 하고 싶게 만드는 식기는 물론, 드립 커피와 토스트기 그리고 와인잔 등. 독서를 즐길 수 있도록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도 마련되어 있었다.


하은재의 하이라이트는 영화실이 아닐까 한다. 간이침대로 이용 가능한 두 개의 소파와 보스 스피커 그리고 빔프로젝터와 스크린이 준비되어 있었다. 영화실답게 IOT 설비를 갖추어 취향에 맞는 조도를 설정할 수도 있다. 여기에 완벽한 휴식을 완성해줄 족욕기도 있다. 영화 한 편 조차 편히 볼 수 없는 현실 세상으로부터 느꼈던 갈증을, 이곳에서 마음껏 풀고 가리라.


침실과 영화실 사이의 공간에는 파우더룸이 있었다. 한옥집에서 가장 모던하게 꾸며진 곳으로, 아늑함을 자아내는 원목형 탁상과 옷장이 있다. 스테이폴리오 숙소라면 하나씩 있는 수토메 향수도 놓여 있다. 숙소마다 어울리는 각기 다른 향을 담아냈다고 하니, 뿌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과 조우하며 단순한 형태로 지은 한옥집인 하은재는 풀과 나무의 향과 잘 어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에 맞게 은은한 허브 향이 코끝을 감쌌다.


침실은 퀸사이즈 침대, 조명, 협탁, 작은 화장실로 이루어져 있다. 한옥 특유의 절제미와 우아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발밑에 놓인 세살문을 열었더니 마당이 보여 개방감이 극대화되었고, 간간이 부는 시원한 바람을 감각할 수 있었다. 보드라운 이불속에 파묻혀 유유자적 한참을 보내자, 삶의 템포를 한결 늦춘 듯 제대로 쉬는 느낌이 들었다.



각자 퇴근을 하고 모이기로 한 가족들이 모두 도착하자, 저녁을 준비했다. 아빠와 나는 서촌 근처의 유명한 도가니 수육 집에서 음식을 포장해오기로 하고, 엄마와 언니는 오리삼겹 바비큐, 젤라또를 배달시키기로 했다. 도가니탕을 받아 오는 길에는 통인 시장에 들러 과일과 간식거리를 사기로. 미리 마련해둔 와인과 브라타 치즈 샐러드까지 더해 한상을 차리니 근사한 만찬이 꾸려졌다. 사실 서촌에서 방문하고 싶었던 식당과 바가 있었지만, 안전한 휴가를 위해 집에서 먹는 것을 선택했다.


내게 '여유로운 아침'이란 비일상적인 일이다. 원래라면 눈을 뜨자마자 나갈 준비를 하기 바쁘다. 여느 직장인이라면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하은재에서 맞이한 아침은 다르게 시작해본다. 잠시 마당을 보면서 멍 때리다가 우선 천천히 샤워를 했다.(하은재의 어메니티는 이니스프리의 프리미엄 라인인 '리스테이'의 친환경 제품이다.) 씻고 나니, 산뜻한 향이 내 몸 곳곳에서 전해졌다. 이제 아침 식사 준비. 빵과 커피처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선택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크로아상과 베이글을 토스트기에 굽자 갓 구운 빵처럼 부풀었다. 기분 좋아지는 냄새들과 함께 여유를 있는 힘껏 부려 보았다. 아침을 먹으면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기도 했다. 소담하지만 평소답지 않은, 근사한 아침이다.


하은재에서 머무는 동안 한옥집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경험했다. 바람과 볕이 잘 드는 한옥에서 사색하며, 여유를 누렸다. 잠시 현실 세상과 동떨어진 듯 사적인 고요 안에서 잘 쉬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서촌을 거닐 때마다 하은재에서의 하룻밤이 은은하게 떠오르지 않을까. 내게는 언제까지나 '마음이 머무는 장소'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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