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삶의 변곡점에는 늘 여행이 있었다.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 대학 졸업 직전, 이직을 앞둔 때 그리고 두 번째 직장에서 어떤 회의감에 빠질 무렵. 생활의 윤곽이 흐려질 때마다 나는 그 틈을 벌려 여행을 밀어 넣었고, 그런 시간을 겪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상의 제자리로 돌아온 뒤에는 기억을 찬찬히 톺아보며 지나간 한때를 일기처럼 썼다. 여행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기록만 한 것이 없었다. 어느덧 추억이 되어버린 순간을 그러모아 글로 치환하는 내내 나는 다시 자유로운 방랑자가 되어 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처음 기록을 시작한 여행지를 돌이켜 보자면 그 기억은 2016년으로 향한다. 당시 나는 22살이었고, 미래에 관한 고민이 머릿속에 가득할 때라 복잡한 심경을 지닌 한편,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즐거운 일을 자주 도모하던 시기였다. 그중 하나가 한여름의 고비 사막을 보기 위해 몽골로 떠난 일이었는데, 지금으로서는 모든 게 믿기 힘들 만큼 황홀했다. 야생 동물이 공생하는 드넓은 초원에서 원시적인 생활 방식에 맞춰 지낸 경험. 그야말로 큰 충격에 가까웠고, 그 땅에서는 핸드폰이 제기능을 상실하고 그저 메모장과 카메라의 기능만 했다. 당시 적은 글의 일부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시간의 존재가 무색할 만큼 기나긴 하루를 살아간다. 제자리를 지키던 해가 서쪽 땅으로 내려앉을 때 허브향이 짙은 언덕을 올라가 보았다. 제주도의 오름처럼 여러 능선이 지평선 끝까지 깔려있었다. 그 위에서 바라본 저녁노을은 다시금 자연에 대한 찬탄을 뿜어내게 했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오히려 기억에는 가장 진하게 남지 않을까. 어느 순간 지금 내 상태, 감정에만 집중해 이 외의 것들은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낯선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려는 인간의 당연한 형성 과정일 수도 있지만 비로소 나만을 위한 시간을 오랜만에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가치와 의미를 좇아 사는 존재라던데 이번 여행은 매 순간마다 가치와 의미가 살아 숨 쉰다. 2016년 7월 7일.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풍경을 보았다. 견고한 강을 따라 펼쳐진 푸른 들판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느 방향으로 보아도 찬란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공기 중에는 상쾌한 향기마저 희미하게 감도는 것 같았다. 푸른 창공엔 말간 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강렬하지만 뜨겁지 않은 햇빛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했다. 굽이진 강 건너 너른 들판에 덩그러니 자라고 있는 커다란 나무. 2016년 7월 10일.’
사막과 호수, 들판을 가로지르며 친구들과 노래 부르고, 춤추던 순간. 밤마다 쏟아지는 별 아래서 보드카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순간. 진정한 자유를 느낀 2주간의 여정을 글로 옮기는 일은 사명감마저 들게 했다. 생의 찬란한 한 때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기록만이 방법이었으므로. 여정의 끝엔 예상치 못하게 골몰하던 주제의 실마리를 찾았고, 형체를 파악했으며, 답을 내릴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점점 더 원하는 삶에 근접했다고 믿는다. 그 이후로 세상을 경험하고 글로 남기는 것에 더 많은 애정과 가치를 두게 되었다.
줄곧 경험과 쓰기의 가치를 중시하는 내게 기자라는 직업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진심으로 희구한 삶이 곧 일로 연결되었다. 마치 여행처럼 밀도 높은 경험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의 멋진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점에서 업의 매력을 느껴왔다. 미술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배움을 이어 나가는 일'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평생에 걸쳐 글을 쓰고, 끝내 창작자로 우뚝 서고 싶은 사람에게 경험과 그 끝에 배움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직업은 필수적일 테다. 창작자로서 스스로의 향상을 도모하는 방법은 곧 경험의 폭을 넓히는 일이기에 꾸준히 무언가를 많이 만나고, 보고, 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두 번째 회사를 관두고 가장 먼저 계획한 일도 여행이었다. 첫 회사를 그만뒀을 때처럼 쉬고 싶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답을 찾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다시 한번 긴 호흡으로 인생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일상을 단련하는 무대가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언젠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사람이니 앞으로 이 일을 건강한 방식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답을 구해야 했다. 일을 놓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알고 싶기도 했다.
그간 디자인, 아트, 건축 분야를 글감의 주재료로 다루면서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장소와 사물, 사람에 대해 기사를 썼었다. 그러다 보니 예술 유산이 풍부한 땅을 탐구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차근히 축적되었다. 모처럼 자유가 생긴 김에 딜레탕트(Dilettante, 전문가적인 의식보다는 단지 애호가의 입장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적 기질을 벗어나 더욱 깊이 좇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2024년 봄부터 여름의 초입까지 디자인, 아트 이벤트가 집약적으로 열리는 유럽의 도시를 자유로이 헤매고 돌아왔다. 그 끝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현재의 나를 앞으로 어디로 데리고 갈 것인지 마주해 보고자 이국에서 쌓아 올린 88일간의 시간을 기록해 본다.
모든 게 경건한 추억 속에,
말로, 그림으로, 사랑으로 보존되고,
새롭고 더 고귀한 옷을 입고
돌아오는 귀향의 축제를 언제까지나 준비하는 것을!
지키는 것을, 변하는 것을 도와주게.
그러면 믿음, 깊은 기쁨의 꽃이 자네 가슴속에 피어나리니.
- 헤르만 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