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e
Paris est Paris! 내가 머물고 있는 파리 에어비앤비에 놀러 온 두 여자가 역시 '파리는 파리'라며 와인잔을 들고 외친다. 프랑스 리옹에 사는 나의 친언니와 같은 기숙사를 살면서 인연을 맺은 가브리엘이다. 파리에서 며칠만 지내보면 그녀들처럼 이 도시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날마다 축제처럼 활기 넘치는 광경이 거리의 모퉁이마다 도사리고 있으니까. 파리를 두고 '움직이는 축제(A Moveable Feast)'라고 명명한 헤밍웨이의 시선을 자연히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전 세계인을 불러 모을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닌 도시라는 사실은,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지내던 시절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고도 변함이 없다.
처음엔 이 도시에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다. 낡은 거리, 냄새나는 지하철, 냉소적인 사람들은 7년 전 반짝이는 눈으로 도착한 내게 약간의 좌절감을 주었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주문부터 계산까지 최소 3시간이 걸리는 상황이 반복되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행의 시작과 마무리를 모두 파리에서 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보물 상자처럼 수많은 다양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탄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파리는 모든 것의 집약체다. 클래식과 첨단 사이에서 무구한 역사와 예술을 펼쳐낸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트 페어, PAD 파리, 파리 패션 위크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디자이너인 세실리에 반센의 팝업 행사라던지 페트 드 라 뮤지크(Fête de la musique, 매년 6월 21일에 열리는 프랑스 음악 축제로 현재는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열린다.) 등 무언가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굵직한 행사들을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 파리의 매혹적인 면모를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는 동네를 꼽으라면 마레 지구를 빼놓을 수 없다.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는 두 여자와 함께 와인 파티 중인 이곳도 마레 지구까지 2km 남짓한 거리에 자리한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어떤 요령이 늘어나는데, 갤러리가 밀집한 동네와 인접한 지역에 숙소를 잡는 것도 경험이 축적되며 생겨난 나름의 잔기술이다. 주변에는 반드시 훌륭한 카페와 레스토랑, 편집숍 등이 있기 마련이다. 원하는 목적지까지 걸어서 20분~25분 걸리는 정도의 거리의 숙소라면 더욱 환영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거리를 산책할 수 있고, 이따금씩 달리기를 하면서 둘러보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마레 지구까지 2km 남짓한 동네에 자리한 에어비앤비를 거점으로 삼으니, 자연스레 가장 많은 발걸음이 그곳으로 가닿았다. 생모르에서 출발해 오베르캄프를 거쳐 마레로 향하는 거리에는 꽃집과 브런치 카페, 식료품점 등 각종 상점이 즐비했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산책길을 숱하게 오간 이유는 갤러리 지구에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타데우스 로팍, 페로탕, 알마인 레흐, 데이비드 즈워너 등의 글로벌 갤러리뿐만 아니라 이봉 랑베르 서점, 피카소미술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재단, 퐁피두 센터 등이 지척에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 기반의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에서는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1983년 설립해 장 미셸 바스키아, 요셉 보이스의 작품을 전시하며 시작한 타데우스 로팍이 국제적인 갤러리로 발돋움한 계기가 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마치 신전으로 향하는 것처럼 낮은 계단을 올라 전시장에 들어섰다. 화이트 큐브에 일렬로 도열한 프레임 속에는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촬영한 패션 사진뿐만 아니라 초상화, 누드, 정물 사진이 있었다. 두 개, 혹은 네 개씩 짝을 지어 전시된 작품을 보면서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관능적인 신체의 일부와 몸짓이 그 자체로 아름답게 다가왔지만, 작품이 무언가 말을 건네는듯해 얼마간 노려 보았다. 남성성을 과시한 메이플소프의 자화상 옆으로 여성처럼 화장하고, 우아한 퍼 코트를 입은 모습의 자화상이 병치되어 있다. 또 우아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델의 오른편에는 실크로 얼굴을 가리고 근육질의 육체를 뽐내는 같은 모델의 누드화가 쌍을 이룬다. 이러한 대조적인 배치로 인해 뿌리 깊은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성 관념을 깨부수고자 했던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메시지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백인과 흑인 남성이 껴안고 있는 사진이라든가, 가냘픈 몸이 부각되는 포즈로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돋보이는 사진 등은 자전적인 이미지로 느껴졌다.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그의 소울메이트이자 펑크 음악의 대모 패티 스미스와 함께 왕성한 예술 활동을 펼쳐 보이던 시기는 1970년대의 뉴욕이었다. 동성애를 혐오하고, 보수적으로 바라보던 때였다. 그럼에도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혁명적 예술가답게 누드와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꽃을 찍는 등 동성애 에로티시즘에 천착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넓혀 갔다. 오늘날 그의 작품을 보면 대담함에 놀라기보다는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가 되기'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경탄하게 된다. 현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정짓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에 열광하니까.
타데우스 로팍에 배치된 파리 갤러리 맵(www.parisgallerymap.com)을 들고 프랭크 알바즈와 페로탕의 전시를 관람한 뒤, 가구 브랜드 레드 에디션(Red Edition)의 쇼룸으로 향했다. 유럽의 아트 갤러리나 가구 쇼룸 중에서는 건물 입구에서 초인종을 눌러 방문을 허락받고 들어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작은 입간판조차 없는 경우가 많아 헤매기 십상이지만, 주소가 맞다면 해당 건물의 내부에는 그 장소가 있을 것이다. 레드 에디션 역시 출입문 옆에 몇 층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초인종을 누르자 몇 초 지나지 않아 굳건한 파란색 대문이 열렸다. 브랜드명이 적힌 층에서 다시 벨을 울리니 직원이 나와 쇼룸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 브랜드의 경우 사전 정보가 있거나 취재한 적은 없었지만, 메르시(Merci)나 보케토(Boketto) 같은 빈티지 가구 숍보다는 요즘 파리에서 활약하는 가구 브랜드를 보고 싶어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다. 레드 에디션의 쇼룸은 파리지앵의 아파트먼트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아한 장식미가 돋보이는 가구와 프렌치 스타일의 미감이 느껴지는 오브제들. 사람이 웅크려 누운 모습을 본뜬 듯한 곡선형 소파나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룸 디바이더, 복고적인 디자인의 조각품 형태의 거울 등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서서히 배가 고파질 즈음 마레 지구의 시장인 마르셰 데 장 팡 루주(Marché Couvert des Enfants Rouges)로 향했다. 17세기부터 시작되어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으로 사랑받는 이곳은 대문이 있는 뜰에 숨어 있다. 푸드코트처럼 다양한 종류의 식당이 줄지어 있고, 채소나 치즈 등 식자재를 파는 상점도 있다. 피크닉을 준비해 갈 때나 간단히 배를 채우고 싶을 때 들리기에 좋은 곳이다. 언제 가도 현지인이 가득해 원하는 식당에 앉으려면 늘 줄을 서야 했다. 매번 내가 향한 해산물 레스토랑 레 장팡 두 마르셰(Les enfants du marché)는 훌륭한 문어 구이와 참치 스테이크, 홍합 요리를 내어준다. 날마다 다른 내추럴 와인을 선보이기에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와인을 추천해 준 직원에게 파리에서 즐겨 찾는 디저트 가게나 카페가 있냐고 물으니, 스쿱 미 어 쿠키(Scoop Me a Cookie)와 카페 데 라 포스트(Café de la Poste)에 들려볼 것을 권했다. 모두 마레 지구에 있는 곳들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첫 주부터 모든 여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나는 마레 지구를 숱하게 오갔다. 지독한 꽃샘추위부터 조금만 걸어도 등줄기에 땀이 내리는 초여름까지 감각하며 이 도시의 변화를 살폈다. 그러면서 나도 조금씩 변해갔다. 다시금 나만의 리듬을 되찾고 무엇을 보고 들을지 선택하는 과정의 연속을 겪으면서. 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점유한다는 사실과 계속해서 변화하는 공간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결국 나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이 아닐까. 집에 둘 꽃을 한 다발 사고, 신선한 과일과 야채로 매일의 식탁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며 고요와 여유로움으로 충일한 아침을 맞이했다. 서울에서라면 일상처럼 누리기 어려운 순간이기에 더욱 깊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주어진 환경에서 매일의 호사를 발견하는 귀중한 한때도 여지없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