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E
패티 스미스(Patti Smith)는 자신의 저서 <몰입>에서 파리를 '지도 없이 읽을 수 있는 도시'라 묘사했다. 정처 없이 걷던 도중 그 문장이 떠오른 이유는 골목길에 난데없이 역사적인 장소의 표식이나 인물을 기리는 명판이 등장했기 때문이리라. 센 강을 중심으로 왼쪽 아래, 6구에 위치한 생 제르망 데 프레를 거닐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골목길이 드물 만큼, 상징적인 장소를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침략과 파괴가 할퀸 땅을 딛고 살아온 사람에게는 오랜 역사가 보존되어 있는 광경이 유독 신비롭게 다가오는 법이다.
패티 스미스는 한때 생 제르망 데 프레에 머물며 알베르 카뮈와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이 자주 드나들던 카페 드 플로르에서 아침을 해결하며 글을 썼다. 오후에는 비좁은 뤼 뒤 드라공 거리부터 빅토리 위고 명판이 있는 30번지를 지나 뤼 그 라바예, 뤼 크리스틴, 뤼 데 그랑 오귀스탱까지 산책했다. 21세기를 구가한 그녀 역시 20세기의 지성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장소를 스쳐 가며 이 도시를 체득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학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생 제르망 데 프레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여전히 현지인과 여행객이 즐겨 찾는 동네로 손꼽히며 명성을 잃지 않은 모습이다.
처음 생 제르망 데 프레에 닿은 것은 우연이었는데, 센 강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버드나무가 아름드리 우거진 베르갈랑 광장(Saule Pleureur de la Pointe)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던 찰나에 배가 고파 피자를 포장하게 되었다. 피자 가게가 고작 생 제르망 데프레 역과 10분 거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강가에 앉아 피자를 먹고 산책 겸 그곳으로 향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을 지나 목적지 없이 걸어 보았다. 어쩐지 너무 유명한 카페나 식당을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고, 그곳만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정도로 걸음을 옮겨 다녔다.
숙소로 돌아와 요즘 생 제르망 데 프레에 생긴 재미난 공간은 없을까 찾아보다가 생 로랑 바빌론(Saint Laurent Babylone)의 존재를 알게 됐다. 올해 초 문을 연 생 로랑 바빌론은 파리 7구 그르넬 거리에 자리한다. 생 제르망 데 프레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인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에서 도보로 6분이면 닿을 수 있었다. 이전에 부티크로 사용되던 공간을 리모델링한 생 로랑 바빌론은 패션 하우스가 선보이는 예술 서점답게 기품 있고 스타일리시한 모습이었다. 미니멀하면서 브루탈리즘적인 인테리어가 두드러졌고, 둥근 형태보다는 직선적인 마감의 테이블, 수납장, 소파 등으로 통일해 세련된 인상을 자아냈다. 다소 거친 느낌을 주는 석조 벽면과 매끈하게 빛나는 다양한 패턴의 대리석 가구의 조합이 돋보였다.
2016년부터 생 로랑을 이끌어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Anthony Vaccarello)가 큐레이션 한 공간으로, 그가 예술적 비전을 담아 만든 리브 드와(Rive Droite)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설립자인 이브 생 로랑과 그의 파트너 피에르 베르제가 1970년에 바빌론 55번지로 이사해 함께 살았던 상징적인 지역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아 이름 지었다. 생 로랑 바빌론에서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패션, 디자인, 사진 분야의 희귀 서적과 예술 작품부터 절판된 빈티지 음반까지 살펴볼 수 있다. 단순한 서점의 차원을 넘어 작가 낭독회, 디제이 세션, 전시 등 다양한 문화 행사도 진행한다. 오픈한 직후에는 프랑스 가수 겸 배우 세르주 갱스부르를 주제로 한 한 특별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방문객을 위해 마련한 널찍한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편히 둘러보기에도 손색없는 분위기였다. 아트 북을 사랑하는 이라면 이봉 랑베르나 봉주르 제이콥 캐널 세인트 마틴 외에도 아지트로 삼을 만한 곳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