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E
볕이 누워 있는 온화한 시간, 볕뉘를 쬐기 위해 공원을 거닐다가 어떤 장면에 사로잡혔다. 나무 아래에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그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바람에 맞춰 일렬로 도열한 나무가 춤을 추듯 흔들렸다. 가지에 매달린 이파리가 흔들리며 내는 소리는 마치 내가 모르는 언어로 대화하는 사람들의 말소리처럼 느껴졌다. 이날 산책 이후로 언젠가 사람과 나무를 주제로 엮은 사진 작업을 해보겠다는 결심이 들어섰다. 메모장을 켜고 다음과 같이 적어 두었다. 'People are talking, Trees are talking'. 사람하고 나무가 동시에 존재하거나, 개별로 존재할 때 서로 닮아있음을 은유하는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파리의 공원을 스칠 때마다 혹은 목적지로 두고 찾아갈 때면 나무와 사람의 형상은 늘 나를 매료시켰다. 루브르 박물관과 개선문,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동선에 놓여 있어 발길이 안 닿을 수 없는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과 경사진 언덕길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며 이 도시의 낯선 표정을 발견하게 만드는 뷰뜨 쇼몽(Parc des Buttes-Chaumont), 평화로운 연못가를 품은 몽소 공원(Parc Monceau) 등에서 수많은 나무와 사람 곁을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이 어우러진 뤽상부르 공원(Jardin du Luxembourg)에서 과거에 떠올렸던 사진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기억났다. 바람 한 점 없는 차분한 봄날이라 나무의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피사체로 느껴졌고 그 순간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로 일정하게 뻗은 나무가 액자처럼 앵글의 기준이 되어 주었다. 책을 읽고, 옆에 앉은 이와 대화를 나누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누군가가 쉬어 가는 모습이 내겐 그늘처럼 반갑고 편안했다.
때론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도시에서 지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이완의 장소와 그 안에서의 휴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쳐가는 존재들과 일별하면서도 그리 슬프지 않은 까닭은 쉼을 위한 장소로 향하는 그 걸음에는 같은 마음이 있다고 믿어서다. 나무 숲이 사람에게 주는 거룩한 시간, 평화를 담은 선물이랄까. 사람과 나무가 공존하는 곳이라면 나는 자주 카메라를 들고 싶다. 평생에 걸쳐 하나의 예술 행위를 이어간다면 그건 바로 뤽상부르 공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