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E
2023년 봄, 뮤지엄 산에 안도 타다오의 두 번째 건축 공간이 생기면서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기자간담회에 나타난 안도 타다오는 오사카 출신 특유의 호방한 유머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첫 발언부터 '저는 어제 오사카에서 왔습니다. 좀 촌스러운 곳이죠. 이렇게 문화적이지 않은 곳에서 왔습니다.'라며 농담을 던졌다. 연이어 강연장에서도 '저는 즐기고 있습니다. 건축 비용은 클라이언트가 내니까요.'라고 발언했을 뿐만 아니라 사무실에서 키우는 강아지 이름을 단게 겐조(1913~2005,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지으려고 하니 주변에서 말려 세계 최고 건축가로 하자는 생각에 르 코르뷔지에를 떠올렸다는 일화를 전하는 등 좌중을 끊임없이 폭소케 했다. 엄숙한 자리가 될 수도 있었던 시간이 그의 개구쟁이 면모 덕분에 아주 부드럽게 흘러갔다.
안도 타다오의 농담 아닌 발언 중 아직도 기억에 선연한 것은 좋은 건축의 선제 조건은 바로 좋은 클라이언트라는 것. 설계는 건축가가 할지라도 그곳에 건물 지을 구상을 하고 공사를 발주하는 것은 건축주이기 때문이다. 건축주와 건축가 간의 상호 신뢰가 선행되어야 목표한 바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한솔그룹 이인희 고문으로부터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깊숙한 산속에 뮤지엄산을 설계해 달라고 의뢰를 받았을 때 당황스러웠지만, 건축주의 세계 최고의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를 등에 업고 설계를 순탄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 철학과 신념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는 또 있었다. 기자간담회와 강연 사이의 틈나는 시간을 활용해 '안도 다다오-청춘' 기획전을 둘러보았다. 전시장 입구에는 '청춘은 인생의 시기가 아닌 어떠한 마음가짐'이라는 시인 사무엘 울만의 시에서 영감 받아 제작된 안도 타다오의 푸른 사과 조각이 있었다. 안도 타다오에게 청춘이란 생각의 자유를 잃지 않는 열정 그 자체라는데, 이러한 태도는 나이를 한계로 인식하는 사고의 틀을 돌파하는 힘이 되어준다.
전시장의 여러 설계도 작품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였다. 프랑스 파리의 곡물 저장소와 상품 거래소로 쓰였던 건물 안에 현대식 구조물을 더해 조성한 미술관이다. 케어링 그룹의 수장이자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의 오너 프랑수아 피노가 수집한 근현대 작품전을 공공에 개방하기 위해 3년간의 리노베이션을 거쳤다. 안도 타다오의 시그니처 건축 스타일인 콘크리트를 주 재료로 사용했으나 익히 보아왔던 것과는 달랐다. 신축이 아닌, 기존 건물을 레노베이션했다는 점에서 색달랐다. 역사적 건물의 원형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반대와 만류가 있었지만 안도 타다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목표했던 바를 관철해 완성시켰다. 설계도를 보면서 파리에 간다면 이곳에는 반드시 가보리라 결심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부르스 드 코메르스에 방문하기 적합한 날을 찾았다. 어쩐지 맑은 날이었으면 했고, 반나절 이상 여유 있게 체류하고 싶었다. 나의 연인이자 전시 메이트인 Y와는 전시를 보기 전에 완벽한 체력과 적당한 허기를 유지하자는 법칙을 세웠다. 몸과 마음에 무리가 없어야 관람하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갤러리 전시는 비교적 작품 수가 적어 가벼이 볼 수 있지만,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경우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우리는 상쾌한 봄기운이 감돌던 4월의 어느 날, 집에서 간단히 브런치를 먹은 뒤 부르스 드 코메르스로 향했다.
파리의 랜드마크를 기준으로 보자면, 부르스 드 코메르스는 루브르와 퐁피두 사이에 자리한다. 마침 운명인 듯 이곳에서는 피노의 수집 컬렉션과 함께 한국 작가 최초로 김수자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김수자는 기획부터 실현까지 전시의 전권을 아티스트에게 일임하는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를 부여받아 전시에 참여했다. 그녀의 작품이 부르스 드 코메르스의 메인 공간인 로툰다와 이를 둘러싼 안도 타다오의 콘크리트 벽과 공명하고 있었다. 그 정체는 418개의 거울이었다. 로툰다의 바닥에 깔린 '호흡-별자리(To Breathe - Constellation)'는 반원형의 천장 돔을 바닥에 반사시켜 하늘과 땅을 무한히 연결한다. 동그란 구가 빚어낸 세계 안에서 관람객은 각자만의 무대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산책하듯 거닐거나,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등 신비로운 장면이 눈앞에 상영되었다.
안도 타다오가 고안한 콘크리트 실린더는 기존 건물의 기하학적 형태와 통일감을 이루며 현대적인 미감을 발산한다. 동시에 역사적 상징성을 품은 로툰다, 돔, 19세기 프레스코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높이 9미터, 직경 30미터의 실린더는 2층 어디에서든 돔의 웅장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실린더로 생겨난 통로에는 24개의 쇼윈도가 펼쳐지는데, 이를 따라 거닐다 보면 지하부터 2층까지 계단으로 모든 전시실에 닿게 된다. 콘크리트 벽의 안팎으로, 위아래로 끊임없이 순환하며 작품을 맞닥뜨리는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곡선과 중첩에서 안도 타다오의 빼어난 기교가 느껴졌다.
전시실을 이동할 때마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감각할 수 있었다. 그 사이사이엔 마우리치오 카텔란, 신디 셔먼, 데미안 허스트, 라이언 갠더 등 동시대 예술가의 작품이 무심하게 놓여 있다. 관람에 열중하다가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올 때면 우리는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로 향한다. 대개의 경우 미술관 속 카페는 훌륭한 전망을 지녔거나, 오래 앉기에 좋은 안락한 좌석을 갖췄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가장 꼭대기에 자리한 레스토랑 알 오 그랭은 이곳에서의 예술 경험을 한층 완벽하게 만들어 주었다. 스타 셰프 패밀리인 미셸과 세바스티앙 브라스가 이끄는 미슐랭 레스토랑(2024년에 미슐랭 인증을 받았다)으로, 약 200년 전 곡물저장소로 역할했던 건물의 역사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를 담아 씨앗, 곡물, 콩류를 베이스로 한 건강하고 현대적인 요리를 주로 선보인다.
알 오 그랑의 입구로 향하는 순간부터 테이블을 안내받고, 식사를 즐기는 모든 과정이 황홀감을 안겨 주었다. 점심에는 3가지, 6가지 코스 중 선택 가능하고, 저녁에는 6가지 코스로만 구성되어 있다. 식사하기 애매하다면 티와 커피,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애프터눈 타임을 이용해도 좋을 것이다. 식사든 디저트든 미술관의 컬렉션만큼이나 아방가르드하고 창의적인 플레이팅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혹여 테라스 뷰 좌석으로 배정을 받았다고 해도 실망하긴 이르다. 낭만적인 도시의 전망을 파노라마 뷰로 만끽할 수 있으니!
섬세하고 세련된 미감의 가구와 오브제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세계적인 디자이너 듀오인 부홀렉 형제의 솜씨라고. 무엇보다도 부르스 드 코메르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유리 돔과 이를 둘러싼 작품을 내려다보며 미식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파리에 산다면 분명 이 장소를 아지트로 삼고, 자주 들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