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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Mar 06. 2018

마레 지구

FRANCE


때론 소소한 일들이 모여 일상의 아름다움으로 번지는 경험을 한다. 버스 기사 아저씨와 웃으며 주고받은 인사라던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반가운 사람과의 만남이라던가, 겨우내 말라있던 나무의 꽃망울이 움트는 모습을 발견한 것과 같은. 하루의 시작, 중간, 끝 그 어딘가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들이 나를 웃음 짓게 하고 기분 좋게 만든다. 어쩌면 평범한 일상을 빛나게 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그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파리의 소호라고 불리는 ‘마레 지구’ 역시 특별히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다기보다는 작고 소소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장소였다.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의 편집샵보다는 주말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둘러싼 활기찬 분위기가 더 돋보였고, 좁고 조용한 골목에 놓인 이름 없는 예술가의 아뜰리에나 소품샵이 좀 더 눈에 띄었다. 마레 지구에는 작지만 빛나는 기쁨이 골목길마다 숨 쉬고 있었고 나는 자연스레 그곳을 부유하게 됐다.


Marché Bastille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는 도시마다 시장 문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매일 장이 서는 곳도 많지만, 보통 주말에 가장 크게 열린다. 그 종류 또한 다양해서 식료품 외에 의류, 식기구, 음반, 화훼, 빈티지 소품 등의 시장도 존재한다. 그중 가장 보편적인 건 당연히 싱싱한 야채와 제철 과일, 육류, 생선 등을 파는 재래시장이다. 마레 지구와 맞닿아 있는 바스티유 광장에는 목요일과 일요일, 규모가 꽤 큰 재래시장이 열린다. 바스티유 시장(Marché Bastille)은 식자재의 싱그럽고 다채로운 색감과 상인들의 밝고 유쾌한 모습을 마음껏 포착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우프(WWOOF) 기간 동안 각종 채소를 캐고 판매용으로 변신시키는 작업을 한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온 터라 양파나 당근 그리고 바질을 보자 감회가 깊었다. 이 시장에 물건을 사러 온 손님들 중 바질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어떻게 재배하고, 어떤 모양으로 묶어야 사람들에게 잘 팔리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거 조금 배웠다고 곱게 손질된 바질 앞에서 헛기침을 해보는 나였다.



Place des Vosges


볕이 적당히 내리쬐는 날이었다. 하지만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기엔 추운 감이 있었다. 내겐 유럽 곳곳의 공원에 올 때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이 쌀쌀한 날씨에도 공원에 오랜 시간 머물고 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냐는 것이다. 아무리 햇빛을 좋아하는 유럽인들이라지만, 콧물이 줄줄 흐르는 것까지 참아가면서 바깥에 나와있을 필요가 있나. 하필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무렵, 그리고 겨울의 한가운데에 유럽을 방문한 내게는 봄과 여름의 공원 풍경이 참으로 궁금할 따름이다. 마레 지구를 대표하는 보쥬 광장(Place des Vosges)의 공원에도 잔디 구역마다 한낮의 오후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유를 즐기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보쥬 광장은 마치 멀끔한 신사 혹은 숙녀의 모습처럼 단정하게 생겼다. 안으로는 완벽하게 정돈된 가로수가, 밖으로는 붉은 벽돌의 건물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어 더욱 우아하고 고풍스럽다. 정 가운데에 귀족의 정원에나 있을 법한 분수가 있고, 공원 한편에는 루이 13세의 기마상이 있다. 이곳이 파리 사람들에게 '작은 낙원'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하며 나도 풀밭에 주저앉아 잠시 쉬어 갔다.



Merci


파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쇼핑 목록에선 메르시(Merci)가 거의 '에펠탑'과 같은 존재다. 많은 이들이 찾는 만큼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인파를 경험하게 된다. 메르시의 상징이자 문지기인 빨간색의 피아트 빈티지카를 지나면 3층 규모의 편집숍 건물이 있다. 1층엔 의류, 액세서리 위주의 상품이 진열되어 있고, 오른쪽 방향으로는 북카페 겸 레스토랑이 있다. 2층은 인테리어 및 가정용품을, 지하에는 각종 화분을 판매하고 있다. 시즌마다 변화하는 메르시는 하나의 예술 공간으로서 기능을 한다. 나는 이곳의 제품 진열 방식이 단순히 판매 목적이라기보다는, 방문자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일종의 '전시회'에 가깝게 느껴졌다. 다소 사악한 가격 때문에 정말 관상용에 그치긴 했지만 멋스러운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Musée national Picasso Paris


 애초에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의 이번 여정은 소위 말해 '피카소 박물관 도장깨기'가 돼버렸다. 말라가를 시작으로 바르셀로나 그리고 프랑스 파리에서도 피카소를 만났으니. 사실 스페인 남부 도시를 여행하던 중 말라가가 피카소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고 그곳에 있는 미술관을 방문했는데,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은 국제학생증이 있으면 무료라는 말을 듣고 어떤 의무감(?)이 들어서 가게 됐다. 파리의 마레 지구에도 피카소 박물관(Musée National Picasso)이 있다는 사실은 진작 알았지만 10유로가 넘는 입장료를 듣고 갈 생각도 안 했다. 여정의 말미라 주머니가 더없이 가벼웠기 때문에. 전시 관람이 사치가 되던 슬픈 때였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인터넷 서칭을 하던 중, 이날 파리의 모든 박물관, 미술관, 성당이 무료입장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면 나는 매월 첫째 주 일요일이 주는 은혜를 감사히 받아야 마땅했다. 오늘은 11월 5일. 정확히 11월 첫째 주 일요일이다. 호스텔에서 가장 가까운 곳, 정확히 돈이 없어서 못 갔던 곳들을 찾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15분이면 피카소 미술관에 갈 수 있었다. 첫 번째 행선지는 여기다! 나는 나른한 오후를 마레 지구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문지기처럼 미술관 대문 앞을 지키던 직원이 Bonjour, Madame!이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방검사.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무료입장이 가능한 걸까 살펴보니, 보통 가격이 쓰여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글씨가 쓰인 표를 발권해서 준다. 이 소식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세 미술관에 가있는 건지, 이곳에도 사람이 많긴 했지만 관람이 방해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겉보기에 큰 규모의 건물은 아니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지하부터 지상 4층까지 전시실로 가득했다. 호텔을 개조한 미술관답게 엘리베이터도 갖추고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가 말라가에서 태어났고, 화가였던 아버지가 그에게 그림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앞서 스페인의 두 도시에서 배웠다. 예술학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피카소는 성인이 되자 처음으로 파리를 여행했고,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존재하던 빈곤과 비참함에 혼란스러워했다는 사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점은 그가 파리의 모습에 매료됐음을 방증한다. 나는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보면서, 개인의 재능과 시대의 환경이 완벽히 결합되어 천재를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떡잎이 남달랐던 피카소지만 예술적 소양을 키워줄 수 있는 아버지, 집안 환경, 시대가 뒷받침되었기에 더욱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비슷한 시기의 우리나라 화가들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대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예술 활동을 꿈꿀 수 조차 없는 혼란한 시대라면, 과연 예술가로서의 성장이 가능하냐는 말이다. 그에 비하면 피카소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어떤 면에서는 스페인에 있던 미술관보다 이곳 파리 피카소 미술관이 훨씬 훌륭했다. 전시실마다 주제가 명확히 표기되어 있었고, 영어로 된 설명이 자세하게 쓰여있어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피카소의 발자취를 시대순으로 밟고 있다는 느낌이 오롯하게 느껴졌다. 또한 회화, 판화뿐만 아니라 조각, 포스터 디자인 등의 작품이 폭넓게 전시되어 있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전시실을 이동할 때 지나가는 계단은 너무나 고상하고 기품이 있어서 고급 호텔을 거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얼떨결에 파리에서도 파블로 피카소 씨를 보고 나니, 앞으로 어디서 그의 작품을 만나더라도 정말 반가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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