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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Apr 01. 2018

금화 훼손과 암스테르담은행의 탄생

금화 훼손과 암스테르담은행의 탄생
  
개인 은행가들의 잦은 파산으로 금융 불안은 높아졌고 지급 결제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는 금화 유통의 불안정성은 이를 더욱 가중시켰다.
  
금화는 은행권이 발달하기 전까지 화폐의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한낱 금속 조각에 불과하던 금이 화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기원전 600년경 소아시아의 리디아 사람들이 자연에서 채취되는 호박금(electrom, 금은 합금)을 주화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기원전 560년경,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 시대에는 합금에서 금과 은을 분리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이로써 순수한 금화가 탄생했다. 이후 금화는 유럽의 중심 통화로 자리 잡으면서 수많은 도시국가에서 사용되었다. 대국인 영국조차도 피렌체의 금화인 플로린(florin)을 사용할 정도였다. 금화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1284년 베니스에서 만든 두카트(ducat)로 이후 약 500년에 걸쳐 유럽의 각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피렌체 금화 플로린의 뒷면

  
  
금화의 문제는 쉽게 훼손된다는 점이었다. 유통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마모되든 의도적으로 훼손되든 액면가와 소재 가치 사이에 차이가 발생했다. 특히 금화의 주변을 살짝 깎아내는 클리핑(clipping)과 금화를 가죽 부대에 넣고 마구 비벼대어 가루를 얻는 땀내기(sweating)를 통해 금을 얻어내려는 시도가 기승을 부렸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그레셤 법칙대로 손상되지 않은 금화는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훼손되어 잔존 가치가 떨어진 악화만이 유통되었다. 결국 정부는 화폐개혁을 통해 금화를 재주조함으로써 무너진 신용 질서를 다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1696년 과학자 아이작 뉴턴을 왕립 주조소 소장으로 임명하여 금화를 재주조했다. 이 과정에서 주화의 주변을 오톨도톨한 모양으로 만들어 변질을 쉽게 측정할 수 있게 했지만(마일드 에지라 불리는 이 형태는 오늘날의 주화에도 적용되고 있다) 훼손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든 나라들이 주화를 훼손한 자를 사형에 처하는 등 엄격하게 처벌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심지어 금화의 무게와 순도를 측정하여 이를 포대 안에 넣고 밖에 내용물을 표기한 다음에 거래에 활용했고 이를 훼손한 사람을 처벌하기까지 했지만 금화의 신뢰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금화가 불신을 받게 된 것이 클리핑과 땀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부가 나서서 금의 함량을 속인 불량 화폐를 발행하면서 신뢰를 더욱 떨어뜨린 것이다. 각종 전쟁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각국의 왕실은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불량 화폐를 발행하여 눈속임했다.
  
금화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신용 질서가 문란해지자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대국은 금화를 재주조하거나 화폐개혁을 통해 신용 질서를 다시 세웠다. 하지만 중계무역으로 먹고살던 많은 도시국가들로서는 재주조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국 내에서도 자신들이 만든 것보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대국에서 만든 주화가 더 많이 유통되었고 암스테르담에서만 해도 천여 종이 넘는 다양한 주화가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재주조가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금화의 불신을 해소했는데 이것이 바로 1609년 암스테르담은행(Thr Bank of Amsterdam)의 탄생을 불러왔다.
  
암스테르담은행은 예금 부서와 대출 부서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었지만 사실 대출은 귀족이나 동인도회사 등에 한하여 매우 제한적으로 제공했을 뿐, 사실상 결제 편의를 제공하는 은행이었다. 암스테르담은행은 금괴나 금화는 물론 훼손된 금화까지 정부 조폐소가 화폐단위인 길더(guilder)로 평가한 금액만큼 고객의 계좌에 넣어주고 이 예금(이를 훗날 등장하는 은행권에 대비해 은행돈(bank money)이라고 부른다)을 결제에 활용하도록 했다. 특히 정부는 600길더가 넘는 환어음의 경우 반드시 암스테르담은행의 예금으로 결제하도록 하여 측면에서 지원했다. 암스테르담은행은 은행돈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일한 금액에 해당하는 금화 등 현물 화폐를 보유했고 이로써 암스테르담은행의 은행돈을 공신력을 얻어 1795년 은행 문을 닫을 때까지 네덜란드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애덤 스미스도 저서 <국부론>에서 암스테르담은행의 성공 사례를 극찬한 바 있다. 은행의 예금은 프리미엄이 붙어 금화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고 은행은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각종 명목의 수수료를 징수하면서 높은 수익을 올렸다.
  
  
  
  
  
참고 자료
  
‘다모클레스의 칼’, 유재수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2015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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