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과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발전이 늦었던 스웨덴이 초기 금융 역사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 발전 과정에서 작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스웨덴은 세계 최초로 중앙은행을 세운 나라이자 은행권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나라다.
그렇다면 스웨덴은 왜 은행권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학자들은 잦은 본위제 변경과 더불어 유별나게 무거운 이 나라의 구리 주화가 은행권 출현에 한몫했다고 주장한다.
유럽 북부에 위치해 어업 및 광업에 의존해 살아가던 스웨덴은 1534년 달러(daler)라는 구리 주화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웨덴이 구리 주화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 데에는 자국에서 많이 생산되는 구리 수요를 높여 가격을 올리려는 속셈도 작용했다. 17세기 들어 국왕 구스타브 아돌프는 다른 나라들이 금과 은을 주조해서 화폐로 사용하는 금은 복본위제를 채택한 것과 달리 은과 구리를 주화로 제조하는 은구리복본위제를 채택했다. 하지만 원재료인 구리에 비해 구리 주화의 가치가 높자 은화는 집에 두고 구리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즉, 그레샴 법칙이 작용하면서 사실상 구리본위제로 운영된 것이다.
문제는 은의 가치가 구리에 비해 거의 100배나 높아 은 주화와 같은 가치를 지닌 구리 주화의 경우 무겁고 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10달러의 경우 가로세로 길이가 1,224센티미터에 무게가 19.7킬로그램에 달했다. 이로 인해 웬만한 거래에서 구리 주화를 사용하려면 운반을 위해 마차가 필요했고 사실상 즉석에서는 대규모 거래가 거의 불가능했다.
스웨덴 10달러와 1달러
1619년 구스타브 국왕은 구리 주화로 인한 거래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예를 따라 은행을 설립하려 했지만 국왕과 상인 간에 누가 설립자금을 댈 것인가를 놓고 다툼이 벌어져 결국 실패했다. 1656년 11월 칼 구스타브 10세가 외국인인 요한 팔름스트루흐에게 스톡홀름은행(Stockholms Banco) 설립 인가를 내주면서 최초의 은행이 탄생하게 된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의 네덜란드 상인이었던 팔름스트루흐는 네덜란드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빚을 갚지 못해 감옥살이까지 한 후 스톡홀름으로 이주한 인물이다. 준수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정착에 성공한 그는 곧바로 상인조합(merchants' guild)의 대표가 되었으며 왕과의 친분을 활용해 은행 인가를 따냈다. 30년간 은행업의 독점을 보장받은 팔름스트루흐는 인가를 내준 대가로 출자도 하지 않은 왕과 귀족들에게 은행의 이익을 나누어주기로 약속했다.
스톡홀름은행에도 지급 결제를 담당하는 환 부서(exchange bank)와 증권을 담보로 대출을 하는 대출 부서(lending bank)가 따로 있었다. 그중에서도 환부서는 무거운 구리 주화를 예치 받고 보관증을 내주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1660년까지 약 40만 개의 구리 주화가 예치되었고 시중에는 은행이 발행한 보관증서가 대신 거래에 활용되었는데 지급의 편리성으로 인해 구리 주화보다 가치가 높았다. 실제 돈의 가치보다 보관증이 더 선호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영국의 금세공업자들이 발행했던 금예치증서에서도 발견된다. 보관증이 지급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수요가 높아지자 팔름스트루흐는 실제 보관하고 있던 구리 주화보다 많은 보관증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은행에 찾아와 구리 주화를 인출하지 않는 한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1660년 국왕이 죽고 어린 왕을 대신해 나라를 통치하게 된 신탁통치위원회는 구리 달러를 재주조하면서 스톡홀름은행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전보다 구리 양이 줄어든 새 주화가 유통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보관증을 들고 몰려와 구 주화로 바꾸기를 원했던 것이다. 새 구리 주화가 함량이 충실한 자신의 구주화와 섞일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예치된 구리 주화보다 많은 보관증을 발행한 팔름스트루흐는 교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뱅크런에 직면했다. 이때 팔름스트루흐는 뱅크런을 피하기 위해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금융의 역사를 바꾼 은행권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은행권의 탄생
상환 요구가 계속되자 팔름스트루흐는 의회에 금화 두카트, 은화 달러, 구리 주화 달러 등 귀금속으로 태환이 가능한 증서를 발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승인을 받아냈는데 이 신용 증서(credit note)가 바로 은행권(bank note)의 최초 형태였다.
스톡홀름 은행권, 유럽 최초의 지폐, 1661년
팔름스트루흐가 발행한 은행권은 BANCO라는 워터 마크가 찍힌 종이 위에 스톡홀름의 문장과 여러 사람의 서명이 들어 있고 금액을 채워 넣어야 하는 일종의 환어음이었다. 오늘날의 은행권에 액면가가 인쇄되어 있는 것과 달리 금액란이 비어 있었던 이유는 당시 스톡홀름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었다. 즉, 스톡홀름은 국제 거래의 중심지여서 자신이 발행한 금화 및 은화를 포함하여 약 20여 개의 주화가 유통되었고 액면가가 다양했기 때문에 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액면가를 몇 개로 한정할 수 없었다.
은행권이 도입되면서 금융 행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면 암스테르담은행이 대출을 할 때 차입인의 계좌에 예금을 넣어주었다면 스톡홀름은행은 금화 및 은화 등 경화와 태환이 가능한 은행권을 교부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정부도 스톡홀름은행권으로 세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스톡홀름은행권은 스웨덴뿐 아니라 유럽의 주요 금융 거점에서 사용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향후 부분 지급제도를 더욱 확고히 정착 시키는 데 기여했다.
인기가 높아지자 팔름스트루흐는 은행권을 발행했는데 은행이 보유한 귀금속 주화보다 많은 은행권을 발행한다는 의심이 커지면서 은행권이 할인 유통되기 시작했고 1663년에는 은행권 소지자들이 일제히 태환을 요구하면서 뱅크런 상황이 발생했다. 은행이 지급불능 상황에 빠지자 스웨덴 정부가 개입했다. 정부는 스톡홀름은행의 면허를 취소하고 모든 대출을 회수해서 상환에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대출 회수는 오늘날로 따지면 통화 공급의 위축을 가져왔고 디플레이션을 유발하여 오히려 대출 채권의 회수를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1668년 스웨덴 정부는 스톡홀름은행을 국유화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스톡홀름은행권이 모든 공적, 사적 거래에서 액면가로 거래되도록 법으로 정하여 은행권이 은행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았다. 한편 팔름스트루흐는 사기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1669년 감형된 후 이듬해 석방되었다가 1년 만에 사망한다.
정부 은행인 중앙은행의 등장
국유화된 스톡홀름은행은 이후 릭센스탠더스은행(Riksens Standers Bank)로 이름이 바뀌어 국왕과 정부의 통제가 아닌, 철저하게 의회의 관리와 감독을 받는 은행으로 재탄생했다. 은행 경영에서 실패를 맛본 국왕과 정부였지만 은행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행과 관련된 전권을 의회에 넘기는 타협안을 마련하여 은행을 계속 유지한 것이다. 의회가 은행을 경영하게 된 것은 당시 칼 구스타브 11세의 왕위를 이은 아들이 겨우 열두 살에 불과해 의회가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의회는 은행과 관련된 입법, 감독에 관한 전권, 그리고 통화신용 정책까지 부여받는 것을 조건으로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현대적인 의미의 중앙은행이 탄생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스웨덴 의회는 귀족, 지식인, 성직자, 농민 대표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농민은 새로운 은행의 소유와 경영에 반대해서 1800년까지 이 은행은 농민을 제외한 3개 계급에 의해 경영되었다는 것이다.
릭센스탠더스은행(Riksens Standers Bank)
새롭게 출범한 릭센스탠더스은행은 스톡홀롬은행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은행권 발행을 금지했다. 이후 1701년에 와서야 필요성이 인정되자 지극히 한정된 사람들에 한해 100달러 이상의 은행권을 발행해주었다. 당연히 은행의 수익성이 좋을 리 없었다. 또한 대출 시 담보로 잡을 수 있는 채권의 종류를 제한하여 대출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대출은 왕과 귀족이 소유한 땅을 담보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의회의 통제를 받던 릭센스탠더스은행 역시 금융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러시아 등과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면서 정부는 릭센스탠더스은행을 동원해 전쟁 비용을 마련했는데 특히 모자당이 집권하고 있던 1740년대와 1750년대에는 이러한 일이 더 자주 반복되었다. 은행권을 남발하면서 물가가 치솟았으며 잦은 태환 정지 조치가 취해지는 등 금융위기가 빈발했다. 물론 전쟁이 잦아들면 다시 태환이 실시됐지만 혼란은 반복되었고 이로 인해 스웨덴의 금융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에야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1866년 릭센스탠더스은행은 릭스뱅크(Sveriges Riksbank)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873년 마침내 오랜 혼란을 마감하고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1897년에는 은행권을 독점적으로 발행할 수 있게 되면서 제대로 된 중앙은행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릭스뱅크는 오늘날 스웨덴의 중앙은행으로 맥을 잇고 있다.
"태초이래 세가지 중요한 발명품이 있었다. 바로 불, 바퀴, 그리고 중앙은행이다."
-윌 로저스(미국의 사회평론가 겸 풍자가)
참고 자료
‘다모클레스의 칼’, 유재수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2015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