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준비제도의 탄생
1912년 미국은 대통령 선거에 돌입했다. 알드리치 플랜을 비롯한 금융 개혁은 대통령 선거의 쟁점으로 등장했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 우드로 윌슨은 월가의 투자은행인 쿤롭사의 제이콥 시프 등으로부터 암암리에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월가에 부정적이던 당시의 여론을 활용하기 위해 알드리치 플랜을, 헌법상 정부에 귀속되어 있는 화폐 발행권을 악덕 민간 은행가들에게 내주는 방안이라고 강조하면서 알드리치 플랜에 우호적이던 태프트 대통령을 몰아붙였다. 또한 푸조 위원회는 월가의 투자은행들이 미국의 금융과 산업 발전을 막는 세력이라고 결론 내렸고, 윌슨의 측근으로서 훗날 연방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푸조 위원회의 발표를 선거에 활용하기 위해 “우리의 금융 재벌”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월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부추겼다. 윌슨은 공화당이 내분을 겪으면서 대통령을 지낸 루스벨트가 제3 당을 만들어 출마하자 태프트 대통령과 루스벨트를 누르고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윌슨의 당선은 알드리치 플랜의 사망 선고와도 같았다.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알드리치 플랜은 극적으로 되살아난다. 취임을 앞둔 1912년 12월 윌슨에게 다시 하원의 은행 및 금융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예정이던 민주당 출신 카터 글라스가 찾아온 것이다. 이 만남에서 두 사람은 알드리치 플랜을 수정하여 통과시키기로 합의한다. 윌슨으로서도 선거 이후 금융 재벌들의 협조가 절실했기에 선거 전과는 태도를 달리 할 필요가 있었다. 윌슨은 의회 내 민주당의 협조를 얻어낼 만큼 알드리치 플랜의 수정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는 연준 이사회와, 여전히 은행가들이 좌지우지하는 연준의 실질적인 권력인 뉴욕 연방준비은행 이사회라는 양대 권력을 절충시킨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그 결과 1913년 12월 연방준비제도법(Federal Reserve Act)이 탄생했다.
연준은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과 달리 12개 지역 은행의 연합체로, 정부에 독립적인 분권화된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던 당초 의도가 외형상 관철된 것처럼 보였다. 아울러 전국은행법의 구조적 한계인 자금시장의 계절적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 평상시에는 여유자금을 모아 관리하는 기능을 하다가 위기 시 추가적인 자금을 공급할 수 있게 했다.
연방준비제도법은 “탄력적 통화를 공급하고, 기업 어음의 할인 수단을 제공하고, 효과적인 은행 감독 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연준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데 바로 이 ‘탄력적 통화 공급’이란 말이 위기 시에 돈을 찍어 금융기관에 긴급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전의 통화는 금화 또는 금은과 태환이 가능한 증서 및 전국은행권으로 이루어져 돈을 찍어낼 때 제약을 받았지만 이 규정으로 위기 시 통화를 제약 없이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연준이 할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은행인수어음(bankers acceptance)이 거래되는 단기 금융시장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은행인수어음은 통상 은행이 발행하는 단기 어음으로, 고객이 물건을 구매할 때 판매자에게 지불한다. 어음을 수취한 사람은 이를 만기까지 보유해야 했으나 연방준비제도법에 의해 할인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단기 금융 시장이 발달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연준의 내면은 당초 설립자들이 생각했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본래의 생각대로 관철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타협을 거친 탓이다. 무엇보다 미국 금융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인 단위은행 제도를 개혁하여 지점이 허용된 전국 규모의 은행 설립 기반을 마련하는데 실패했다.
또한 정부로부터의 독립성도 형식적이어서 곧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는 재무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즉, 1917년에는 회원 은행들이 연준에서 자금을 빌릴 때 정부 채권을 담보로 활용하도록 했으며 할인 창구를 이용하는 금융기관들로부터 프리미엄을 받던 관례를 벗어나 정부채의 경우에는 오히려 낮은 할인율을 적용함으로써 은행들의 정부채 매입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이러한 협조로 인해 1917년에서 1920년 사이 많은 돈이 풀리면서 물가가 높아졌고 이렇게 풀린 돈은 미국을 떠나 독일 등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갔다. 이 돈은 결국 훗날 유럽 국가들의 주식 버블을 야기했다.
따라서 연방준비제도법이 제정되었지만 전국은행과 주법은행이 공존하는 은행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전국은행은 연준의 회원 은행으로 의무 가입해야 했지만 주법은행 역시 원할 경우 회원 은행으로 가입하여 연준이 제공하는 창구 할인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더구나 연준에 가입한 주법은행도 개별 주법에 의해 지점 설치의 자유 등 일부 특권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렇게 연준 가입을 주법은행의 자율에 맡긴 조치는 1930년 대공황 때 큰 혼란을 야기했다. 연준이 회원 은행에만 긴급 유동성을 공급하고 비회원 은행은 지원하지 않아 더 많은 파산을 야기했고 이것이 필요 이상으로 통화 공급을 축소시켜 대공황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한편 연준의 출범은 기존의 금융 감독 체제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남북전쟁 직전 전국은행법에 의해 신설되었던 연방통화감독청장이 사실상 통화 정책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연준이 통화 공급량을 조절하게 되면서 전국은행권 관리 업무마저 사실상 종료되자 연방통화감독청장에게 남은 것은 은행의 검사와 감독 기능뿐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정부가 임명한 의장 및 이사들의 보수가 민간 은행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던 지역 연방준비은행 총재보다 낮았고 정부 내에서의 서열도 보잘것없었다는 점이다. 의전에서도 최근 설립된 기관이라는 이유로 항상 끝자리에 배정되었다. 의전에 불만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윌슨 대통령도 “소방서장 다음이 적절할 것”이라며 다소 올려주라고 했을 뿐이었다.
더구나 비토권을 가진 지역 연방준비은행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초기 낙선한 정치인을 이사로 임명하여 이사회의 기능이 거의 유명무실 해지자 대부분의 권한을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인 벤저민 스트롱이 행사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연준의 설립으로 이제 금융 혼란이 끝날 것이라 기대했고 윌슨을 연준의 설립자로, 글라스를 수호자로 치켜세웠다. 연준의 메인 빌딩인 에클스 빌딩 로비에는 윌슨과 글라스의 동상이 서 있는데 특히 글라스의 동상 밑에 새겨진 글은 연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연방준비 제도법을 통해 우리는 위대하고 활력 넘치는 은행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은 단지 주기적인 금융위기를 바로잡고 치유하며 나아가 금융산업에만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교역의 비전, 확장성 그리고 안전을 담보하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산업의 가능성과 능력을 넓히는 데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준은 탄생 후 곧바로 불황에 직면했고 금융위기를 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황을 대공황으로 이끄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대공황은 미국은 물론 세계경제를 파멸로 이끌었다.
참고 자료
‘다모클레스의 칼’, 유재수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