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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Apr 12. 2018

17세기 영구의 이자율과 최초의 장기국채

17세기 영구의 이자율과 최초의 장기국채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고하노니,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혹은 교묘한 기술을 사용하든 속임수를 쓰든 간에 100을 주고 10 이상을 이자로 챙기는 사람들은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별별 꼼수와 술책을 다 부린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결국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 에드워드 코크 경, <영국법제요> 제1권 제1부
  
영국의 법정이자율은 1571~1624년에 10%, 1624~1651년에 8%, 1651~1714년에 6%였다. 이는 군주에 대한 대출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군주에 대한 단기 대출 이자율은 제공된 담보물의 품질에 따라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앤트워프 채권시장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았고 또 런던의 금세공사들이 예금을 기초로 은행업을 발달시켰기 때문에 군주에 대한 대출은 주로 런던 금세공사한테서 빌리는 단기 부채의 형태를 띠게 됐다. 이외에 강제 이자율이 명시되지 않은 강제 공채도 존재했다. 금세공사가 군주에게 대출해주었을 때의 이자율 수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640

찰스 1세

일반 이자율

8%

1660~70

찰스 2세

  

8

1665

찰스 2세

세금 담보

8~10

1660~85

찰스 2세

  

10~20

1660~85

찰스 2세

최고 이자율

30

1680

찰스 2세

세수입 담보

6

1690

윌리엄 3세

  

10~12

1690

윌리엄 3세

무담보

25~30

  
영국 최초의 장기 국채(national debt)는 프랑스와의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1692년에 처음으로 발행됐다. 당시 맥주와 기타 주류에 부과한 세금을 담보로 1700년을 만기로 하는 10% 종신연금의 형태로 100만 파운드를 조달했다. 반톤틴식(출자자 중 사망자가 있을 때마다 배당을 늘려 맨 나중까지 생존한 자가 전액을 받는 방식) 연금은 이자율이 7%였다. 연금 청약자 중에 77세까지 생존한 사람이 있었다. 1693년에 소금세를 담보로 16년 만기 조건으로 10%의 이자에 복권 당첨의 기회를 부가하여 100만 파운드를 더 조달했다. 결국, 총 대출 비용, 즉 이자율 수준은 14%로 상승했다.
  
이처럼 높은 이자율은 군주들이 감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영국에서는 군주 대출 이자율 이외의 다른 이자율은 이보다 훨씬 낮았고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는 정부가 3%의 이자율로 자금을 융통할 수 있었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이 같은 금융 구조를 몹시 부러워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군자금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하자 영국 정부는 1694년에 톤세(선박이나 화물에 부과하는 세금)를 담보로 12만 파운드 규모의 신규 공채(이자율 8%)를 발행했다. 투자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가외 혜택도 부여했다. 즉, 이 공채 청약자는 영란은행의 주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17세기 말까지 단기 상업 신용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금세공사들이 예금주에게 4~6%의 이자를 지급했다는 사실에서 17세기 초 상업 대출 이자율은 6%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군주 대출의 경우에도 담보물이 확실한 때에는 이자율이 8% 수준이었던 것으로 봐서 우량 상업 대출은 이자율이 6%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법정이자율이 8%(이후 6%)였다는 부분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기록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17세기 런던에 ‘단기 금융시장’ 혹은 ‘채권시장’이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없다.
  

  
  
  
참고 자료
  
‘금리의 역사 -제4판 ’, 시드니 호머·리처드 실라, 리딩리더, 2011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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