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나
안녕하세요. 전에 블로그를 하다가 브런치로 오게 된 신입회원입니다. 제가 쓰고 싶은 글의 종류가 있는데 블로그에서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브런치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블로그에서는 주로 영화 소개를 하는 글을 주로 적었는데 영화 그 자체보다는 조금 더 수필처럼 저의 주관이 많이 들어간 글을 쓰고 싶어서 브런치에 연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생각은 일주일에 소설(연재 혹은 단편)을 한 편씩 연재하고 평상시에는 영화 리뷰를 쓸까 합니다. 좀 주관이 강하게 말이죠. 아직 브런치에 대해 잘 몰라서(사용법도 그렇고 소통법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이해와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initiation - 문화 인류학의 개념의 하나. 미개인 사이에서, 청년 남녀에게 씨족(氏族) 또는 종교·주술 단체(呪術團體) 등의 성원으로서 가입될 자격을 주기 위하여 행하는 공공 행사나 훈련. 때로는 엄격한 고행(苦行)·시련 등이 수반됨. 성년식(成年式). 입단식(入團式). 입사식(入社式).
출처 : 구글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어떤 ‘집단’에 속하게 된다. 태어나면서 가족이라는 집단에 속하고 의무에 따라 학교라는 집단에 속한다. 그 속에서 반, 동아리, 어울리는 친구 무리에 따라 집단을 또 달리하며 이후 직장 또는 군대에 소속된다. 최근에는 SNS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으며 카카오톡 등 메신저 프로그램의 단톡방으로 다양한 집단에 소속되고 끊임없이 소통한다. 그럴 때마다 같은 감정이 반복된다. 설렘과 즐거움, 이후 다가오는 권태와 짜증 말이다. 어쩌면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반복의 과정 중 후자의 감정을 이겨낸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명함이 아닌가 싶다.
사랑. 사랑을 하면 집단 중 가장 작은 소집단이 생겨난다. 바로 너와 나다. 이 집단 속에는 우리 둘 뿐이며 우리가 써 나가는 역사만이 존재한다. 처음은 언제나 같다.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설렘.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일상. 마치 우주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내 다가오는 권태와 짜증, 그리고 다 포기하고 싶어 지는 무력함. initiation, 가입, 개시,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하지만 인류학적인 개념에서 보자면 이 단어가 품고 있는 뜻은 ‘성년식’이라는 의식과 관련된다. 사랑에도 성년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성인이 되어서 처음 하는 사랑, 처음으로 경험하는 성숙한 사랑 말이다.
영화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이런 ‘사랑의 성년식’을 다룬 작품이다. 80년대 후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뚱뚱하고 못생긴 모태솔로 스즈키다. 남들 연애할 시간에 공부한 그는 남들보다 빨리 진로가 결정되어 있다. 어느 날 미팅에 펑크가 나 친구들은 그를 부른다. 하, 날 부를 만큼 펑크가 갑자기 났나?라는 생각으로 미팅을 향하는 스즈키. 4대 4 미팅에서 그는 풋풋하고 귀여운 마유에게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저런 퀸카가 날 좋아해 줄 리 없지 라고 생각할 때, 놀랍게도 마유가 관심을 보이는 거 아닌가. 그래, 그렇게 스즈키의 첫사랑은 시작되었다. 그의 가슴은 처음으로 사랑으로 인한 두려움과 떨림을 느꼈고, 기쁨과 인내를 맛보았다. 하,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는 마유를 통해 사랑의 ‘성년식’을 경험한 것이다.
그 대단한 사랑의 힘은 스즈키를 변화시킨다. 살을 빼고 섹시한 미남자로 변신한 스즈키. 외모의 변화만큼이나 그의 인생에도 변화가 다가 온다. 지방을 벗어나 도쿄로 발령이 난 것. 신입사원인 그에게는 엄청난 찬스이며 인생을 바꿀 기회가 다가오지만 이 기회는 다른 시점에서 보자면 위협으로 다가온다. 성년이 되면서 가정을 떠나 사회로 나가는 거처럼, 스즈키는 그가 평생을 살아왔던 동네를 벗어나 도쿄라는 낯선 환경을 홀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의 성년식의 가장 큰 걸림돌은 사랑의 성년식을 치러준 마유라는 존재다. 사랑을 할 때면 버려야 할 몇 가지가 있다. 하지만 아직 첫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즈키는 알지 못한다. 사랑과 미래, 둘 다 자신이 짊어질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과신한 것이다.
하지만 몸과 정신이라는 게 어찌 그리 쉽게 관리가 되겠는가. 힘들면 쉬고 싶고, 풀리지 않으면 짜증 나는 게 사람이다. 거리는 멀고, 돈은 쪼들리고, 도쿄 지부에서 만난 미야코라는 여자는 예쁜 데다 자기한테 관심을 보이고. 스즈키에게 마유는 ‘이니시에이션 러브’다. 초등학교 1학년, 대학교 1학년, 입사 1년....... 처음 집단에 들어가 기대와 설렘을 가지지만 동시에 어색하고 미숙한 시기다. 능숙하지 않고 부족한, 그리고 집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시기. 스즈키와 마유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고 그들이 작가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 어색하고 부족해도 서로 알기가 힘들다. 한데 이들의 사랑에 미야코가 들어왔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집단에 4학년 졸업반 선배가 들어온 것이다. 능숙하고 매력적으로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는 선배를 보니 미숙하고 어리숙한 동기들이 같잖아 보이는 거처럼 스즈키는 마유에게 점점 권태와 짜증을 느낀다.
그래, 어차피 그녀는 나에게 ‘이니시에이션 러브’ 일뿐이야. 누구나 한 번쯤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야. 그녀의 감정이 뭐가 중요해? 마유에게도 일깨워줄 필요가 있어. 그녀도 아직 이니시에이션 러브에서 깨어 나오질 못하고 있잖아. 성년식을 끝내야 성년이 될 수 있는 거야. 그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반전이 발칙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성년식. 성인이 된다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다. 특히 사회가 원하는 성인이 된다는 건 그만큼 상처가 크다는 의미다. 그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니 말이다. 사랑에 있어서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상처가 크면 둘 중 하나다. 아예 연애와 담을 쌓고 살거나 더 독해져서 전문 사랑꾼(?)이 되거나. 아마 스즈키는 둘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정말 다재다능한 재능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신만의 세계관이나 연출법이 뚜렷하지 않은 츠츠미 유키히코 감독이 메가폰을 잡지 않았다면 더 흥미로운 작품이 나올 뻔했다는 아쉬움이 큰 영화였다. 좀 더 감정을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너무 보이는 반전에 치우치지 말고 주인공이 가진 심리를 깊게 풀어내어 감정이 가진 반전을 내세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성년식. 사랑에도 성년이 가져야 할 의무가 있다. 흔히 사랑이 성숙하다는 말에 필요한 요소로 밀당과 인내를 말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필요한 건 자부심이 아닌가 싶다. 그래, 자부심. 우리가 만드는 우주가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찬란하다 생각한다면 눈이 옆으로 돌아갈 일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