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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 찌개를 담아내기에는 부족했던 종지그릇

                                                                                                            

‘사람이 작아진다’는 소재는 영화나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다. 주로 어드벤처물에서 사용하는 소재라는 점에서 관객들이 <다운사이징>에 기대한 모습은 흥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작아진다는 소재를 이용해 사회문제, 더 넓게 본다면 인류 전체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아메리칸 라이터’ 알렉산더 페인은 그의 영화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단면을 조명해 왔다. 알렉산더 페인의 초창기 블랙코미디 영화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닌 어두운 이면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이 영화는 <시티즌 루스>, <일렉션> 그리고 <디센던트>에서 보여주었던 알렉산더 페인의 스타일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핵심적인 소재는 ‘다운사이징’이라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인간을 작게 만들어 주며 작아진 인간은 미니멀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 인간이 작아지면 무엇이 좋은가? 다운사이징 기술의 발견 이후 시간이 흐르고 화면은 폴을 보여준다. 폴은 몸이 아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른 후 폴은 결혼해 있고 세상은 다운사이징 기술의 발달로 미니멀 라이프가 가능해져 있다. 폴은 여전히 그 집에 살며 결혼을 했다. 부인은 더 큰 집을 원하지만 대출을 받을 수 없어 포기해야 되는 상황이다. 그의 상황을 추측해보면 이렇다. 폴은 평생 가난과 함께 살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아마도 병원에 입원할 만큼 돈이 많지 않아 집에서 주사에 의존하다 생을 마감했을 것이며 폴은 이 집을 제외하면 마땅한 재산도 없을 것이다. 아마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건 그들의 경제상황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미니멀 라이프’는 새로운 삶을 열어줄 탈출구다. 몸이 12.7cm로 줄어드는 만큼 재산의 가치는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다운사이징 기술이 가지는 의의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개인의 부다. 영화에서 몸이 축소된 이들은 전에는 누릴 수 없었던 높은 수준의 부를 누리게 된다. 집도, 차도, 음식도 작아지니 그만큼 돈이 적게 드는 것이다. 재산이 1억이라면 120억을 누릴 수 있는 게 이 작품 속 작은 도시들에 사는 이들의 삶이다. 이는 폴 같은 이들을 경제적인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며 많은 부를 지녔으나 최상층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 최상층 부의 삶을 누리게 만들어 준다. 두 번째는 인류의 보존이다. 대부분의 SF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미래의 모습은 인구 과잉과 환경문제, 식량문제로 인한 인류의 위기다. 다운사이징 기술을 통해 인간의 크기를 줄이면 쓰레기 배출량이 줄어들며 식량문제 역시 해결할 수 있다. 인간의 크기 축소는 개인의 부는 물론 인류 전체의 장기적인 생존과 생활을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두 가지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의 가치문제다. 다운사이징을 결정한 폴을 축하해주는 자리에서 한 남자는 폴 일행에게 시비를 건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이 남자의 입을 빌려 질문한다. 작아진 사람들은 소비를 적게 하고 세금도 적게 낸다. 그런 사람들은 가치도 줄어들기에 투표권도 줄여야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비극적이지만 소비력과 노동력으로 책정되어 진다. 그러하기에 현대사회에는 이런 모순이 발생한다. 인구가 필요 없는데 필요한 비극. 생각해 보라. 미래를 예견한 작품들은 인구폭발과 이로 인한 환경문제, 식량부족문제를 언급한다. 그런데 국가는 계속해서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서민계층은 사람이 많아지면 힘들다.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적인 부가 상위계층에 쏠려 낙수효과가 이뤄지지 않는 나라일수록 빈곤층은 늘어난다. 그럼에도 인구가 필요하다 말하는 이유는 노동력이 필요하고 자본가들이 생산한 물품을 소비해 줄 소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작품에서 남자는 폴에게 전형적인 자본주의형 인간의 질문을 던진 것이다. ‘너 작아지면 소비력도 노동력도 줄어드는데 네 인간된 가치도 줄여야 되는 거 아냐?’ 하고 말이다.


두 번째는 기술력의 악용이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가 전쟁 등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는 점에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처럼 기술의 발명은 기술 자체에 상관없이 사용하는 인간에 따라 행운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다운사이징 기술은 더 윤택한 삶을 살게 해주지만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몇몇 독재국가들에서는 그들의 체제 유지를 위한 처벌의 도구로 사용된다. 폴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녹 란은 반정부 시위를 하다가 작아지는 형벌을 받고 미국으로 떠내려 오게 된다. 그녀와 함께 박스에 실렸던 시위 참가자들은 다 죽고 그녀는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이 사람들은 작은 사람들의 마을에서 가장 낮은 하층민의 삶을 살아간다. 부가 넘쳐흐르는 마을인 이곳의 문제는 이 하층민들에게 있다. 다들 잘 먹고 잘 사니 굳이 하류계층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이 하층민들은 남미 혹은 아시아에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이들이다. 이들은 유럽이나 미국의 작은 마을들의 사람들처럼 자신들이 원해서 온 게 아니기에 부를 지니고 있지 않다. 


복지라고는 전혀 없는 이 세상에서 그들은 노동에 시달리고 병에 고통 받는다. 이런 모습은 전 세계의 부를 소유했으나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보다는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경제선진국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은 환경을 오염시키며 성장을 거듭해 왔으나 강력한 환경규제로 개발도상국들의 발전을 막는다. 또 처리하기 힘든 오염물이나 쓰레기를 빈민국에 팔아치우며 이들과의 불공정 무역으로 많은 부를 취한다. 감독은 인종을 구별해 이런 갈등구조를 더욱 뚜렷하게 조명한다. 막대한 부를 소유했으나 가난한 빈민들은 약 하나 없어 죽어나는 세상, 이런 세상의 모습은 이런 저런 핑계로 부조리를 감싸고 보호하며 부를 지켜온, 뛰어난 기술력으로 축적한 부와 힘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는 선진국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이 느껴진다. 


이 영화가 ‘다운사이징’이라는 기술로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문제는 영화가 이 이야기들을 담아내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다는 점이다. 영화의 이야기 흐름을 살펴보다. 처음 다운사이징 기술의 발견 이후 시간이 흐르고 폴과 병든 어머니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폴의 결혼생활과 다운사이징 기술을 받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폴만 작아지고 아내는 확신이 차지 못해 작아지는 걸 포기하고 친정으로 가버린다. 이 지점에서 다시 시간이 흘러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시간을 건너뛰는 진행의 경우 그 시대의 변화에 따른 인물의 행동과 태도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중점은 폴을 향했어야 했다. 감독은 녹 란 트란의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자신이 생성한 세계의 모든 배경을 독자들에게 주입시켰다. 자, 이제 남은 건 이 세계에 들어온 폴이라는 인물이 어떤 선택을 펼치는지 다.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이 영화는 갑자기 노르웨이를 향한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이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한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페인 감독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말 기막힌 세계를 창출해냈다. 그리고 이 세계를 통한 현실에 대한 비판에 열을 내고 싶었을 것이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고 또 하고 싶다 보니 인물에 중점을 두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터미네이터2>를 예로 들자면 관객들은 이 작품에서 터미네이터가 존 코너를 지키는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다. 헌데 감독이 ‘오, 미래세계 이야기에 대한 설정이 너무 좋아!’라고 생각한 나머지 계속 그 설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관객이 재미를 느끼고 기대를 할 만 한 포인트를 작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놓쳐버리고 말았다고 본다. 그래서 이 영화의 결말은 (개인적으로) 최악에 가깝다. 이런 근사한 이야기를 펼쳐놨으면서 인물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없으니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페인의 영화들의 결말이 얼마나 근사했던가. <어바웃 슈미트>에서는 실컷 행복을 찾아 돌아다녔던 슈미트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아이의 그림 하나에 울음을 터뜨리고 <사이드웨이>의 열린 결말은 관객들에게 설레임을 안겨주었다. <일렉션>은 또 어떤가. 손을 든 여자아이에게서 트레이시의 모습을 본 제임스의 표정은 단연 압권이다. 이 영화의 결말도 로맨틱하다. 또 ‘결국 중요한 건 사랑과 인간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가치’라는 이야기에 가슴이 설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거대담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그 안에서 수동적인 인물을 넣어놓더니 ‘마지막으로 넌 능동적이어야 해!’라고 말하듯 사랑을 선택하는 결론을 내리는 감독의 태도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든다. 이 영화는 노르웨이에 가기 전까지, 그때까지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다양한 재료들이 섞인 찌개처럼 수많은 길을 가졌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후 선택한 길은 찌개를 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종지그릇처럼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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