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차 대전을 다룬 독특한 영화 10편

작년 12월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쇼아>라는 무려 556분에 달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이틀에 걸쳐 보았다. 유대인들을 몰살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던 첼모 수용소, 트레블링카 집단처형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르샤바 게토를 배경으로 인물들의 인터뷰가 주를 이루는 작품이었다. 헌데 이 영화에서 인터뷰에 응한 폴란드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며 나치가 그들에게 한 짓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2차 대전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많은 유대인들이 분투했으며 그들의 자본은 헐리웃으로 유입, 수많은 2차 대전에 관한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영화는 진중하고 세부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알기 힘드나 어떤 주제에 관심이 생길 때 가장 쉽고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고 큰 파급력을 지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늘은 2차 대전을 다룬 독특한 영화 10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나는 부정한다>


영국의 한 역사학자가 이리 말했다고 생각해 보자.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당시 위안부도 강제 징용도 없었다. 그건 전부 꾸며낸 이야기다. 명확한 증거가 없지 않느냐.’ 아마 SNS로 융단폭격을 당할 것이다. 1996년, 역사학자 데보라는 이상한 소송에 휘말린다. 그녀가 홀로코스트가 없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데이빗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미국과 달리 영국의 법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기에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데보라. 아니, 왜 모두가 아는 사실을, 수많은 증인들이 있는 사건을 증명해야 하지? 이는 당시 나치가 홀로코스트의 사진을 찍지 못하게 막았다는 점, 데이빗처럼 개인적인 편견과 아집에 쌓인 사람이 역사를 선동과 날조로 만들어낸다는 점이 만들어낸 촌극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군부독재 시절 온갖 악행이 있었으나 이를 부인하고 부정하는 ‘역사학자’들이 존재한다. 누구는 코끼리를 볼 때 코를 보고 누구는 발을 본다. 또 누군가는 코끼리의 똥만을 본채 코끼리를 더럽다 결론짓기도 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꽤나 더럽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생각해 볼 법한 질문을 던진다.



너무 아픈 변명, <사라의 열쇠>


유럽 내에서 독일 민족은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민족으로 여겨져 왔다. 그들의 이런 성향은 나치의 지도하에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그들은 철저한 상명하복의 정신을 지닌 공무원들처럼 명령을 수행했다. 이 작품에서 한 신문기사는 <나는 부정한다>의 데이빗처럼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며 말한다. ‘유럽에서 가장 이성적인 독일인들이 설마 그런 행동을 했겠어요?’ 설마 했던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사라의 가족들은 당황한다. 설마 여자와 아이들까지 잡아들일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사라는 동생이 잡혀가지 않게 하기 위해 동생을 방 안의 비밀공간에 넣고 열쇠로 문을 잠근다. 헌데 전 가족이 끌려오게 되면서 동생이 혼자 방에 감금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영화는 1942년 아픔을 겪어야 했던 사라와 2009년 이 사건을 취재하게 된 기자 줄리아 사이의 연관성을 통해 가장 이성적인 민족에 의해 자행되었던 가장 끔찍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꿈을 빼앗겨야 했던 청춘들, <나폴라>


혹시 시간이 난다면 한 번쯤 읽어보라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히틀러의 아이들>이라는 책이다. 이 작품은 당시 나치가 소년 나치단을 조직하면서 얼마나 많은 청춘들의 꿈과 희망을 조직적으로 빼앗았는지 보여준다. 사회는 시스템을 만들고 시스템은 사람을 키운다.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 자란 이들은 정신을 개조당하고 끔찍한 기억만을 지니고 살아간다. <나폴라>는 엘리트 사관학교에 입학하며 신분상승을 꿈꾸던 한 젊은 청년이 모든 걸 잃어버리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 사이에는 우정도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명령과 조직만이 있을 뿐이다. 독일은 나치에 의해 현재만 잃어버렸던 게 아니다. 그들은 수많은 미래도 잃어버리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시대의 양심을 말하다,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요즘은 대학의 의미가 많이 변질되었다. 기업에 입사하기 전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위한 교육을 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대학이지만 원래 대학이란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을 키워내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의 경우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성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힘을 숨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불의에 맞서고 저항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를 지니고 있다. 나치 정권 당시 독일도 그랬다. 많은 젊은이들이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모임을 만들었다. 시와 재즈를 좋아하는 순수한 소녀 소피는 오빠와 함께 백장미단에 가입, 히틀러를 비난하는 전단을 뿌리다 체포되게 된다. 영화는 그녀의 재판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역사가 지닌 고통과 아픔에 대해 사과할 줄 아는 독일이기에 이런 영화가 등장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그들을 심판할 권리가 있는가, <뉘른베르크의 재판>


앞서 말한 소피 같은 젊은이들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린 판사들. 그들은 시대의 양심을 저버린 이들이다. <뉘른베르크의 재판>은 헤이우드라는 미국 판사가 종전 후 독일 재판관들을 재판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질문은 마치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와 같다. 과연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들이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눈감아 주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끝으로 팽창의 야욕을 접길 바란 것이다. 미국은 2차 대전을 통해 무기를 수출하며 막대한 부를 적립하였다. 이렇게 유럽과 미국이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독일의 국민들은 나치에 의해 고통을 받아야 했고 그들의 협박과 회유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고 재판관 측의 변호인은 열변을 토한다. 과연 너희들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 전쟁이라는 가장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목숨을 건지기 위한 이들의 행동을 이성이란 이름으로 심판할 수 있느냐. 이 영화의 물음에 어떤 답을 내릴지는 여러분의 몫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유로파 유로파>


개인에게 전쟁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다. 생존이다. <유로파 유로파>는 전쟁 중 살아남기 위해 정체성 따위는 개나 줘버린 소년의 이야기다. 유대인 소년 솔로몬은 독일을 피해 폴란드를 향하지만 폴란드까지 독일군이 닥치자 가족과 같이 안전한 장소로 피난을 간다. 하지만 그 도중 솔로몬은 형을 놓치면서 혼자가 되고 소련령 고아원에 들어가 ‘스탈린 만세’를 외친다. 그 와중에 독일군에게 붙잡히자 독일인인 척 행세하고 청년 나치 학교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유태인을 죽이는 훈련을 받는 솔로몬. 그는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다 잘라버린다. 영화는 한 소년의 모습을 통해 사상과 이념으로 얼룩진 전쟁 속에서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얼마나 하찮은 이유로 인간이 싸우고 죽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이를 다 포기한 ‘생존’을 통해 말이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가혹하다, <랜드 오브 마인>


전쟁은 강력한 흑백논리가 이뤄지는 장소다. 아군 아니면 적군이 전부다. 아군에게 많은 애정과 우정을 느끼는 것만큼 적군에 대한 반감과 증오도 커지는 게 전쟁터다. 영화는 종전 후 독일군이 덴마크에 설치한 수많은 지뢰들을 제거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덴마크군은 독일군이 설치한 지뢰이기에 독일군이 치워야 된다 생각하며 이 작업에 포로로 잡힌 독일 소년병들을 투입한다. 이들의 관리자인 덴마크 장병 칼은 독일군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처음에는 소년들을 미워하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에 동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동정이라는 감정은 언제나 그렇듯 위험하다. 한쪽이 감정을 거두는 순간 관계는 박살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동정을 넘어 이해를 말한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가혹하다. 서로가 처한 그 가혹함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전쟁이라는 아픔은 사라질 수 있다.



아픔을 인식하는 방법, <사울의 아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처럼 삶이란 건 가까이 인지하지 않으면 그 슬픔을 알 수 없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알게 되면 아픔이 보이기 마련이다. <사울의 아들>은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속 주인공인 사울의 시점만을 카메라로 따라다니며 오직 그에게만 집중한다. 그래서 수용소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 나치의 만행은 직접적인 영상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통해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감할 뿐이다. 영화는 이런 카메라의 시점을 통해 영상이 주는 공감 대신 관객의 사유를 자극해 인지를 유도한다. 서양인들이 일본 제국주의로 인한 한국과 중국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이런 사유의 부족 때문이라고 본다. 그들은 왜 한국과 중국이 일본과의 미래를 그리지 않는지, 왜 일본에 대한 반감과 증오를 품는지 알려하지 않는다. 사유를 통한 인식은 희극만을 바라보는 안일한 시선에서 벗어나 비극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충격적인 동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김영하 작가는 동화란 건 원래 잔혹하다고 말한다. 동화의 잔혹함을 통해 아이들에게 경각심과 교훈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이 슬픈 동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그래서 영화가 주는 시각적인 자극은 덜하다. 다른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처럼 자극적이지 않다. 다만 이 영화가 주는 결말의 충격은 상당하다. 더 무서운 건 이 결말에 이르렀을 때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왜 누군가의 죽음에는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다른 누군가의 죽음은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 이는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오히려 속 시원하게 여겼던 당시 유럽인들의 마음을 동화라는 방식을 통해 풀어낸다. 



현대에 나치는 다시 부활할 수 있는가, <디 벨레>


<디 벨레>는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했던 실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실험에서 교사는 학생들을 집단적으로 결속시키는 실험을 했는데 이 결과가 너무나 강력해서 일찍 시험을 종료했다고 한다. 2차 대전 당시 나치는 독일인들을 하나로 묶었고 전체를 강조했다. 영화 속 교사는 실험을 위해 학생들을 ‘디 벨레’라는 조직으로 묶는다. 각자의 생활을 영위하던 학생들은 집단에 빠져들고 그들은 결속 속에서 다름을 배타한다. 그들은 무지막지한 집단으로 점점 변모해간다. 우리나라 속담에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뭉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말인데 이처럼 집단이 뭉쳐 하는 행동이나 말은 그 실체나 정당성에 상관없이 큰 힘을 발휘한다. 나치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부활한 서북청년단을 생각해 보라. 잘못된 정권이 힘을 얻고 그들이 다수가 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내 호가호위를 누린다. 나치는 언제라도 다시 부활할 수 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작가’의 달콤한 유혹,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