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회가 만든 빈공간의 모순

영화 <로우>




*주의! 이 글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영화 <인터스텔라>의 이 명대사는 숱한 위기를 극복하고 견뎌온 인류의 자세를 대변한다. 인류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답을 찾아냈고 이겨냈다. 그리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그 답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포유류 중 가장 약한 존재임에도 명석한 두뇌와 사회성을 바탕으로 지구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회라는 이름으로 규칙을 만들어 그 틀에 속하지 않은 이들 혹은 규칙에 어긋나는 이들을 배척해 왔다.

 

배척당한 이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든 답을 찾아왔다. 힘을 합쳐 저항을 하든, 굽혀서 들어가든 혹은 정체를 숨겼든 말이다. 집단은 강한 힘을 지니고 있고 집단 밖의 이들은 약자라는 칭호를 갖게 된다. <로우>는 그 칭호를 받은 이들의 이야기이다.


    


<로우>는 '인육을 먹는다'라는 소재 때문에 고어물로 인식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이 포인트를 주고자 하는 지점은 보통 고어물처럼 잔혹함을 통한 생리적인 쾌감과 거리가 멀다. 가족이 채식주의자인 저스틴은 생텍쥐페리 수의대학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만난 언니 알렉시아는 동생에게 입학 의식이라며 강제로 토끼 내장을 먹인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저스틴은 그날 이후 내면에서의 이상한 변화를 느끼게 된다. '인육'에 끌리게 된 것이다.

 

저스틴이 인육에 빠지게 된 과정은 그녀를 둘러싼 세계의 모순에 있다. 프랑스라는 국가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정신을 국기에 새긴 나라이다. 하지만 이런 정신과는 반대로 < 400번의 구타 >라는 영화에도 담겨 있듯 아동 체벌이 존재하는 국가다. 생텍쥐페리 수의대학에도 이 세 가지 정신 중 무엇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의 상징이라는 대학에는 선배들의 강압적인 폭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눈에서 벗어나면 찍힌다.


알렉시아 역시 이런 폭력을 보고 한 학기를 지냈으며 그 폭력을 동생에게 전가한다. 동생에게 강제로 토끼 내장을 먹이면서 사랑으로 감싸주지 않는다. 무리의 틀에 가두려는 강압, 선배가 후배를 강압하고 괴롭히는 구조, 자매 사이임에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 사랑의 실종은 국가가 품은 정신에 완벽하게 위배되는 공간을 보여준다.


    


수의대학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동물을 살리는 일을 하지만 동시에 죽인다. 동물을 해부하고 그들의 살을 학생식당에서 급식으로 먹는다. 이들도 의사이지만 <로우>의 수의대학 학생들의 모습에서 '살리다'라는 의미는 발견하기 힘들다.

 

그들은 신입생에게 피를 뿌리고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시체를 가지고 놀기도 한다. 그들은 사명감이 있는 의사인지 아니면 기계적으로 치료를 익히고자 하는 기술자인지, 그들에게 동물이란 어떤 존재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저스틴이 속한 세계의 모순 속에서 저스틴은 본성처럼 인육을 먹게 된다.

 

그 모순은 육식에 있다. 평생 채식만 해온 본인이 육식에 더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본능처럼 빠져든다. 대학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랑 대신 강압을 강요하는 언니, 무엇을 위해 동물을 치료해야 되는지 알 수 없는 모순된 세계 속에서 인간이 인간의 살을 먹는 가장 모순된 행동을 취한다. 이 순간 저스틴은 사회가 말하는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 범주란 무엇인가. 시험을 본 저스틴은 교수에게서 답이 '틀렸다'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헌데 이 답은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 아닌 교수 마음대로 판단한 후 내린 답이다. 답이란 판단하는 사람에 의해 맞고 틀리고가 결정된다. 저스틴을 둘러싼 세계는 틀린 세계다. 하지만 그녀는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반면 그녀의 인육을 먹는 행위는 틀린 행위이다. 이는 사회가 정한 규칙에 위반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점에 주목한다. 사회가 정한 규칙과는 반대되는 빈 공간이 낳은 모순, 그 모순을 어떻게든 숨기고자 노력하는 인간. 그런 인간의 모습을 '인육을 먹는다'라는 극단적인 설정으로 담아낸다. 인구 문제, 환경오염, 고령화 사회 등 인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이에 대한 올바른 답은 알고 있지만 판단하는 '절대자'의 기준에 따라 정답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 정답에는 본질적인 흐름과는 다른 모순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모순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틀리다'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답'을 찾는 그 모습은 <인터스텔라>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결말이 인상적인 건 이 지점에 있다. <인터스텔라>에 나온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라는 대사가 전율과 감동을 주었다면 <로우>의 같은 대사는 공포와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는 딸들이 사회가 정한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길 원했고 이를 위해 채식을 시켰다. 하지만 자유로운 대학에서 일어난 강압이라는 모순은 그녀들의 본성을 깨웠고 결국 오답을 받아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다시 '답'을 찾아낼 것이라 말한다. 작품에서 인육은 시선을 끄는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 인육을 통한 충격보다 더 큰 충격은 끊임없이 사회가 지닌 모순에 맞춰 답을 찾아나가야만 하는 이들이 지닌 고통과 통증에 있다 할 수 있다.

 

알렉시아의 잘려나간 손가락, 저스틴의 푹 파인 볼, 살이 뜯긴 그들 아버지의 가슴에 남은 상처는 이런 과정이 남긴 상흔을 의미한다. <로우>는 충격적인 설정으로 포장된 인류 역사의 그림자를 다룬 영화라 할 수 있다. 사회는 이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모순 속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작가의 이전글 음악의 감성으로 담아낸 '스타 탄생' <스타 이즈 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