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을 기점으로 나에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편견'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2015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만난 여배우 김민희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고 현재까지 연애를 지속 중이다. 문제는 그가 유부남이라는 점과 그의 영화들이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 그의 사생활이 떠오른다. 이 과정에서 홍상수의 영화들은 두 가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첫 번째는 변명, 두 번째는 변주이다.
연인 김민희의 입을 빌려 변명을 토하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가증스러웠다. 홍상수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사상이나 생각을 강하게 전달하는 장면에서 열변을 토하는 영희(김민희 분)의 모습은 불륜에 대한 정당성을 말하는 자기변명처럼 느껴져 불쾌했다. 반면 김민희를 활용한 '변주'를 보여준 <그후>는 신박했다. 그의 영화 속 남성들은 여전히 비겁하고 뻔뻔하며 이런 모습을 다채롭게 표현한다. 전작에서 변명을 일삼던 김민희가 이 뻔뻔함 속에서 희생자가 되는 모습은 색다른 매력을 주었다.
<풀잎들>은 이런 변명과 변주가 적절하게 조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익숙하면서 동시에 신선하다. 그 신선함은 도입부부터 펼쳐진다. 차분하고 절제된 감정을 선보이던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미나(공민정 분)는 '네가 죽였어!'라며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고 홍수(안재홍 분)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이 모습을 홍상수의 연인, 김민희가 맡은 아름은 바라보며 자신의 목소리로 서술한다. 이 영화의 신선함은 아름의 위치에 있다. 아름은 관찰자이다. 그는 카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로 그들에 대해 말한다.
작품 속 내레이션은 아름의 생각과 판단이다. 그녀는 노트북을 가지고 무언가를 쓰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동생이 데려온 여자친구에게는 '내 동생에 대해 잘 아느냐'며 꾸짖듯이 이야기한다. 그녀는 사랑에 있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다. 그러면서 아름은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감독은 아름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통해 아름이라는 캐릭터의 정체를 서술한다.
홍수와 미나는 친구의 죽음으로 다투고 연극배우 창수(기주봉 분)는 자살을 시도했다. 동생과 만난 음식점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는 존경받는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격렬한 대화를 나눈다. 세 대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먼저 죽은 사람은 존경받는 이다. 홍수와 미나가 그 죽음에 안타까워 한다는 점, 창수가 경수(정진영 분)가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점, 음식점 대화에서 존경을 담은 안타까움을 내뱉는다는 점이 이유다.
다음으로는 그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린다는 점이다. 아름의 입장에서 듣게 되는 그들의 말은 명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가십'이다. 그럼에도 아름은 이에 대해 생각을 말하고 의견을 내며 판단을 한다. 이런 아름과 주변 사람과의 대화는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네티즌들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름은 단편적으로 주워들은 정보로 그들을 판단한다. 동시에 그녀는 잘 아는 게 중요한 거라며 생판 남인 동생의 여자친구에게 설교를 내뱉는다.
이는 제3자의 입장인 네티즌들이 자신들의 열애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며 '예술인 홍상수는 죽었다.', '여배우 김민희는 사라졌다.'라고 말하는 현실을 담아낸 것이라 본다. 누군가는 이들의 연애에 대해 홍상수를 탓하고 다른 누구는 김민희를 탓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커리어가 끝난 거처럼 이야기를 한다.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얼굴이 좋아졌다'의 의미는 이 두 사람을 뻔뻔하게 생각하는 대중의 시선이 섞여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아름 캐릭터에 대한 추측은 그녀와 경수와의 만남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무엇을 쓰느냐는 경수의 말에 그녀는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자신과 함께 글을 쓰자는 경수의 부탁을 거절하는 아름의 모습은 남에 대해서는 보는 만큼, 듣는 만큼 판단하고 정의를 내리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보여주지도 표현하지 않으면서, 가십 거리에 반응하는 네티즌들의 모습을 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독특하게도 그 역할을 김민희에게 맡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클레어의 카메라>에서의 김민희는 현실에서의 김민희 같았고 홍상수가 입을 빌려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는 캐릭터 같은 모습이었다.
헌데 이번 작품에서의 그녀는 완벽한 관찰자가 되어 자신을 감춘다. 이런 변주는 여전히 변명이 느껴지지만 그 변명마저 색다르게 보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특히 아름에게 '비겁하다'고 말하는 경수의 모습은 비겁하고 가증스러운 훈계지만 동시에 귀여운 느낌을 주어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런 변명과 변주는 제목을 통해 완성된다. '풀잎'은 풀의 잎으로 흔하디흔하다. 흔한 풀잎처럼 사람에게 사랑은 흔한 일이다.
그런 흔한 사랑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재단하지 말고 지나가면서 보게 되는 풀잎처럼 흔한 것이라 여겨 달라 말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의 사생활과 분리하여 바라보기 힘들 만큼 소재와 캐릭터적인 측면에서 홍상수라는 사람과 가깝다. 하지만 뻔하고 뻔뻔한 변명을 흥미로운 변주로 바꾸어 놓는 그의 능력은 여전히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