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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보다 잔혹한 '현실의 삶'에 대하여

소설 <크림슨의 미궁>


개인적으로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 가지 시각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개미의 시각이다. 자신의 앞만 바라보기 때문에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 길이 언덕길인지, 낭떠러지인지도 모른 채 그저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만 간다. 두 번째는 새의 시각이다. 높은 하늘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기에 어디가 막다른 길인지 또 어디가 빠른 지름길인지 안다. 흔히 새의 시각을 지닌 이들은 개미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비웃고 경멸한다. 사회의 흐름과 정보전에 능한 젊은이들이 언론에 휘둘리고 그저 먹고 사는 데만 급급한 기성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러할 것이다.



문제는 새의 시각을 가진 이가 ‘새’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새의 시각을 지닌 개미라면 삶이란 고통 그 자체이다.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돌아갈 자신은 없고 나아갈 의지는 상실하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크림슨의 미궁>은 장르만 보자면 서바이벌 게임이다. 여느 서바이벌 게임 작품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플롯을 지니고 있다. 헌데 이 작품의 작가가 <검은 집>, <악의 교전>의 기시 유스케라는 점에서 색다른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는 범죄 소설의 대가로 풍부한 지식을 통해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끌어가는 작가이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인간에 대한 탁월한 심리묘사이다. 그는 캐릭터 하나하나에 진중하게 캐릭터성을 부여하고 이들의 심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여기서 좀 더 파고들어 가자면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진중하게 접근하고 신중하게 이야기한다. <크림슨의 미궁>은 후지키라는 노숙자가 벙글벙글이라는 오세아니아의 한 섬으로 납치를 당해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를 비롯한 서바이벌 게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각자의 게임기를 통해 서로 다른 정보를 얻는다. 그들은 정보를 조합해 방향마다 서로 다른 서바이벌 아이템이 있음을 알게 된다. 후지키는 처음 만났던 아이라는 만화가와 함께 정보를 택하고 북쪽을 향한다.



각자 아이템을 얻은 사람들은 이를 인원에 맞춰 나눈다. 이때 아이는 정보를 완전히 공개하지 말 것을 후지키에게 요청한다. 서바이벌 게임은 ‘생존’도 중요하지만 ‘숫자’가 중요하다.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지 아니면 최후의 1인 혹은 2인이 생존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와 무기, 식량을 지니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게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데스 매치’가 되어야 게임이 흥미롭다는 점이다.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특히 대부호들이 즐기는 서바이벌 게임은 인간의 목숨을 게임 속 캐릭터처럼 여긴다.



후지키와 아이가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이 영화의 기본 플롯은 서바이벌 게임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큰 차이가 없다. 헌데 기시 유스케 작가는 이 작품에 두 가지 특이점을 집어넣는다. 첫 번째는 후지키의 과거이다. 작품은 후지키의 입을 통해 그의 과거를 서술하게 만든다. 후지키는 실직을 당한 후 아내에게 버림받아 노숙자처럼 살아간다. 그는 성실하게 그리고 흔히 말하는 남들처럼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길거리에서의 삶은 커다란 재난처럼 다가온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잔혹한 서바이벌의 삶과 더 잔인한 현실의 삶. 서바이벌은 서로를 죽여야 탈출할 수 있는 삶이지만 목적이란 게 있다. 상대를 죽이고 살아남는다면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명확한 명제가 있다. 헌데 현실의 삶은 어떤가. 열심히 공부를 해도, 성실하게 살아도,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행동을 하지 않아도 불행이 닥치고 패자가 될 수 있다. 서바이벌은 생존이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그 어떠한 행위가 다 용납이 된다. 명확한 규칙과 이에 따른 보상이 존재한다. 반면 현실의 삶은 궁극적인 목표를 잡는다 하더라도 그 목표가 진정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행복한 삶을 꿈꾸고 행복하다 여겼는데 어느 순간 이게 진정한 행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처럼.



열심히 살아왔고 보상을 받았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보상이 아니었다면 그보다 허무한 게 있을까. 후지키에게는 직장과 결혼은 그런 보상과 같았다. 자신이 살아온 길에 대한 명확한 실체라 여겼던 그 보상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사람처럼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대해 잔인하다 말하지만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는 꿈을 이룰 기회를 잡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다. 승자가 얻는 보상이 명확하다. 반면 우리의 삶은 승자가 되었다 여긴 순간 패자가 될 수 있고 보상이 바람처럼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불명확성을 지니고 있다.



두 번째는 리얼 엔딩이다. 후지키는 서바이벌 게임 중 서바이벌 책을 얻게 된다. 선택한 페이지에 따라 다른 결과가 계속해서 연결되는 이 서바이벌 책(국내에도 게임용 도서로 판매된 적이 있다.)에는 세 가지 결말이 있다. 첫 번째는 해피 엔딩, 두 번째는 새드 엔딩, 마지막은 리얼 엔딩이다. 리얼 엔딩은 모든 게 꿈 또는 환상이었다는 결말이다. 작품의 결말에서 후지키는 이 리얼 엔딩을 택하는 거처럼 끝을 맺는다. 그는 살아남았고 보상으로 많은 돈을 얻었다. 이 엔딩이 해피 엔딩이 아닌 이유는 서바이벌 게임에서 만났던 아이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에게 사랑을 느꼈고 혹 지금 승자의 삶이 망가진다 하더라도 그녀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녀를 만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라 여기기 때문이다.



헌데 과연 이 선택이 ‘리얼 엔딩’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서바이벌 게임의 세계는 명확하다. 승자와 패자. 이기면 승자고 지면 패자이다. 이 세계는 REAL(진짜의)이라는 단어에 딱 들어맞는다 할 수 있다. 반면 후지키의 선택은 리얼이라고 보기에는 괴리가 있다. 그는 정확히 아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추론과 추측을 거듭하며 향한 장소에 그녀가 있을 것이란 확증도 없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를 만난다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 향할 수 있을지에 대한 보장된 미래가 없다.



이 선택을 ‘리얼 엔딩’으로 포장한 이유는 삶이 지닌 흐름성에 있다. 삶은 모호하고 불규칙하다. 흔히 게임 북의 리얼 엔딩은 모든 걸 꿈이나 환상으로 포장하고 병원이나 집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꿈이나 환상 속 인물을 현실에서 만나며 여운을 준다. 이 여운 이후의 상황은 동화 속 Happily ever after’가 될 수도 있고 첫사랑처럼 순식간에 잊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후지키가 이 엔딩을 택한 이유는 결국 삶이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임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에게는 서바이벌 게임이 더 현실과 같았고 더 명확했으며 더 실체를 지녔다. 노숙자라는 구렁텅이에 빠진 삶과는 달리 합리적이고 뚜렷했다. 하지만 그는 새가 아닌 개미다. 다시 길 위에 놓여 졌고 어딘가를 향해야 한다. 후지키의 새의 시각은 오직 서바이벌 게임 속에서만 빛났다. 현실에서의 새는 괴롭다. 그는 아이를 만나는 게 자신에게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또 자신에게 새로운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새처럼 날아갈 수 없는 그는 개미처럼 그 현실에 부딪치기로 결심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봐야 알 수 있는 미련한 사람처럼 직접 기어가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후지키의 선택은 진정한 ‘리얼 엔딩’이라 할 수 있다.



<크림슨의 미궁>은 서바이벌 게임을 통해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인간이 새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아무리 먼 곳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곳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지닌 부정과 부패, 무력함과 한계, 불운과 붕괴는 한 개인이 감당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높은 산에서 흐르는 물줄기처럼 그 흐름 자체를 바꿀 수 없다면 바라만 봐야 된다. 그러기에 인간은 스스로 개미가 되고자 한다. 차라리 바보처럼 앞만 보고 살아가는 개미가 내적인 고통을 완화시켜주기 때문이다. 잔인하다 여겼던 서바이벌 게임은 승자가 될 수 있는 가장 명확하고 쉬운 지름길이며 인생은 답도 궁극적인 목표도 설정할 수 없는 ‘미궁’이다.



우리는 누구나 미궁 속에 빠져 있다. 개미처럼 이 미궁 안을 배회하고 있다. 출구를 안다 하더라도 갈 수 없는 게 인생이란 미궁 속에 갇힌 인간의 운명이다. 기시 유스케는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흥미로운 설정 안에 삶의 복잡한 의미를 담아냈다. 이 작품을 읽은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생각을 정리하기 힘들었다. 정리할 책이 너무 쌓였고 더 두었다가는 작품 자체를 까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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