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12월 한국영화 기대작 중 한 편인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상대적으로 기대가 덜한 영화다.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시동>이 포스터부터 단발머리를 한 대세배우 마동석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백두산>이 이병헌X하정우 콤비에 백두산 화산 폭발이라는 대규모의 블록버스터를 선보일 예정으로 기대를 모은 반면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이야기는 큰 재미를 주기 어려운 소재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시사회로 먼저 접한 입장에서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입소문을 기대하게 만드는 재미를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영화는 세종대왕과 장영실 사이에서 뽑아낼 수 있는 모든 소재를 버무려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 영화는 관노비인 천민 장영실이 세종의 도움으로 종3품 대호군에 오른 건 물론 자격루, 천문 의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다. 이런 전개의 핵심은 도입부에 있다.
임금이 타는 가마인 안여(安與)가 부서지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서 있는 세종 사이로 '죽여주시옵소서'를 외치며 바닥에 엎드린 신하들의 모습은 안여를 만든 장영실과 그 안여에 탔다 사고를 당한 세종 사이의 관계가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박진감 넘치는 시작은 이후 과거로 향하면서 세종과 장영실, 조정 관리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긴장감 있는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이런 긴장감이 와 닿는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현재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신분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선의 관리들은 장영실이 관직을 받는 걸 반대한다. "천한 것에게는 천한 본성이 남아있어 관직을 주면 안 된다"는 대사헌 정남손의 말은 신분제를 통해 자신들의 조직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사대부들의 정신을 보여준다. 특히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글을 익히면 신분제가 무너진다며 한글에 반대하는데, 이 역시 씁쓸함을 안긴다.
세종은 이런 조선의 분위기에서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정치를 펼치고자 하는 이상주의자이다. 그의 이상은 장영실을 만나며 현실을 꿈꾸게 된다. 세종에게는 꿈이 있지만 이를 이룰 재주가 없었다. 반면 장영실에게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지만 이를 보여줄 수 있는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 세종은 자격루(물시계)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며 '이를 조선의 실정에 맞춰 만들 수 있다'는 장영실의 말을 통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믿음을 보낸다.
세종은 정남손의 말에 "천한 본성을 바꿀 수 없다면 그대들은 왜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백성을 노예처럼 여기고 그들을 부려먹을 생각만 하는 공고한 정치권의 카르텔에 한 방을 날린 것이다. 장영실을 향한 세종의 믿음은 관직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친구처럼 영실에게 다가가고 자신의 꿈을 나눈다. 이 '꿈'이라는 키워드는 제목 '천문'과 연결된다.
하늘에 묻는 질문을 의미하는 '천문'에는 함께 하늘을 보며 각자의 꿈을 말한 세종과 영실의 바람이 담겨 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은 세종과 그런 세종을 끝까지 곁에서 도와주고 싶어 하는 영실의 마음은 애틋한 브로맨스를 형성한다. 두 중년배우는 눈빛만으로 서로의 진심을 전하는 연기를 통해 가슴 한 구석을 따뜻하면서도 아리게 만든다.
< 천문: 하늘에 묻는다>은 세 가지 장점을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가는 플롯이다. 세종과 장영실 사이에 굵직한 사건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하며 너무 새로운 느낌의 낯선 것과 너무 익숙한 느낌의 낡은 것 사이의 균형을 이룬다. 둘째는 긴장감과 따뜻함, 유머를 적절히 배합해 다양한 감정을 준다는 점이다. 긴장 뒤에 감동을, 감동 뒤에 웃음을 배치해 리듬감을 보여준다.
셋째는 구멍 하나 없는 완벽한 캐스팅이다. 세종 역의 한석규와 장영실 역의 최민식의 완벽한 브로맨스 호흡은 물론 신구, 김홍파, 허준호, 김태우, 오광록 등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은 눈을 즐겁게 만든다. 또 김원해-임원희-윤제문으로 이뤄진 감초 3인방은 적절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 8월의 크리스마스 > <봄날은 간다>에서 <덕혜옹주>로, 감성적인 로맨스 영화에서 시대극으로 노선을 바꾼 허진호 감독은 현대에 어울리는 감성으로 장영실과 세종의 우정을 표현해냈다. 현대사회의 계급사다리와 카르텔 문제를 보여주면서도 두 중년배우에게서 브로맨스의 감성을 끌어낸다. 무엇보다 정적인 장르라 여겨졌던 사극에 과한 픽션을 더하지 않아 관객들의 거부감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긴장감과 흥미, 감동을 담아낸 점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