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PC란 없다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적 정의를 추구하자


최근 코로나19다 보니 집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자주 봅니다. 시간이 없어서 놓쳤던 작품을 다시 보는데 그중 OCN 오리지널 드라마 ‘블랙’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 강하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승사자지만 사정에 의해 형사의 몸에 들어간 블랙과 함께 죽음을 앞둔 사람을 살리고 사건을 해결하던 그녀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녀가 살린 사람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자 정신병원에서 탈옥한 뒤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말이죠. 검은 안경을 낀 장님은 자신도 그녀처럼 다른 이의 죽음을 볼 수 있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이 살린 사람이 더 큰 죽음을 야기하면서 스스로 두 눈을 찔렀다고 말합니다.


PC는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말입니다. Politically Correct의 줄임말로 정치적으로 옳은 걸 뜻합니다. 이 PC는 최근 문화나 경제를 비롯해 사회 곳곳의 분야에 퍼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수면 위로 올라온 건 동성애와 인종차별입니다. 영화계에서는 이런 현상이 도드라지는데 동성애 영화는 아트버스터라는 이름으로 큰 사랑을 받게 되었으며, 디즈니는 실사 영화에 다양한 인종과 동성애, 장애인 등을 등장시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역시 2016년, 제88회 시상식을 기점으로 변화했습니다. 이 시상식에서 흑인 영화인들은 ‘왜 아카데미는 흑인 영화를 무시하느냐’며 대대적으로 항의했습니다. ‘오스카소화이트’라는 이 운동은 윌 스미스 부부와 스파이크 리 등의 감독이 불참을 선언했고 영화제 내내 트럼프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작품상은 감독과 주연배우를 비롯한 제작진 대부분이 흑인인 ‘문라이트’에게 돌아갔습니다. 이후 아카데미의 행보는 PC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영화들에 작품상을 수여한 것이죠. ‘셰이프 오브 워터’는 외계인과 농아의 사랑을 그렸고, ‘그린 북’은 이탈리아 이민자와 흑인 피아니스트의 우정을 이야기합니다. 작년 수상작인 ‘기생충’은 빈부 격차를 그린 아시아 영화죠.


이런 PC의 행보는 세상이 평등과 평화라는 더 올바른 가치를 향해가는 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아카데미의 흑인 영화인 차별을 이야기했던 제88회 시상식 당시, 사회자였던 크리스 록은 무대 위에 올라온 세 명의 동양인 아이를 향해 ‘미래의 회계사들’이라며 ‘가장 헌신적이며 정확하고 근면하다’는 유머로 비꼬았습니다.


이는 아시아인이 회사를 위해 희생하고 수학을 잘 한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는 덧붙여 ‘내 농담에 화난 사람은 스마트폰으로 트위터에 올려라. 그 스마트폰도 이 아이들이 만든 것이겠지만’이라 말했습니다. ‘오스카는 하얗다’라며 백인 잔치라 비판하는 자리에 오히려 동양인을 조롱한 겁니다.


5월,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통해 전국적으로 번진 흑인 시위는 흑인들이 당했던 차별과 조롱, 무엇보다 미국 사회에서 하층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문구를 내세운 운동에 나섰습니다. 이 문제가 우리나라까지 퍼지고 몇몇 셀럽들이 이에 대한 지지를 밝히며 또 다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들이 코로나19 상황은 물론 평상시 미국 사회에서 행하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입니다. 미국 흑인들이 동양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사회적인 문제로 야기되지 않습니다. 이는 흑인들이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소 웃긴 말이죠? 인종차별의 대상인 흑인이, 지난 몇 백 년을 노예의 삶을 살아온 그들이 권력이라니요. 이는 명백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이자 폭력으로 들립니다.


정치권이 관심을 지니는 문제는 하나입니다. 그 문제가 표로 직결될 때입니다. 정치는 자기편을 많이 끌어들이는 싸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자기를 지지해 줄 수 있는 주장을 해야 합니다. 흑인은 정치권에 의해 그 대상이 됩니다. 흑인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인과 셀럽은 많지만 미국 내의 동양인 문제에 대한 목소리는 울리지 않습니다. 흑인이 백인과 평등을 이룬다면 동양인이 그 다음 대상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나씩 ‘약자’라는 대상을 정하고, 그 대상이 연대를 통해 힘이 생겨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면, 그 다음에 목소리를 내는 게 과연 PC라고 할 수 있을까요.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역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북유럽 계열의 금발미인들이 차별을 당한다는 겁니다. 최근 실사화가 결정된 ‘인어공주’를 예로 들자면 주인공을 동화와 달리 흑인으로 설정하면서 디즈니 특유의 다양성과 PC를 또 다시 선보였습니다.


이는 반대로 백인 여배우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역할이 사라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소 의아한 점은 여주인공은 흑인 배우지만 남주인공은 백인의 잘생긴 남성을 캐스팅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문화에서 여성의 힘이 강해지면서 잘생긴 남자주인공은 건들 수 없지만 여주인공에는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선택적 PC와 다양성을 선보이는 겁니다.


이는 최근 실사화 된 ‘뮬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디즈니가 이 작품에 중화권 미인 배우 유역비를 캐스팅한 이유는 결국 중국 내 흥행을 위해서입니다. 정치가 표가 중요한 거처럼 엔터 사업에서 중요한 건 팬입니다. 디즈니는 PC와 다양성을 내세우는 작품을 선보이지만 동시에 흥행을 중시합니다. 그 이유가 ‘인어공주’는 흑인이 되었지만 ‘뮬란’은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동양 미인 배우가 되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최근 본 영화 ‘미스비헤이비어’에도 이런 정치와 흥행을 위한 논법이 등장합니다. 1970년, 달 착륙보다 많은 사람이 봤다는 미스 월드 대회의 우승자는 미스 그레나다, 대회 최초의 흑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회는 이전부터 제기되어 온 인종차별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큰 키에 금발, 오똑한 콧날과 큰 눈, 하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백인 미인 만이 우승을 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이에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로 논란을 겪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백인과 흑인을 한 명씩 우승자로 선정해 대회에 참가시킵니다. 그레나다의 장관은 심사위원들에게 대놓고 변화가 필요하다며 압박을 줍니다. 이는 미의 기준 역시 정치적인 논법과 사회 상류층의 움직임에 따라 바뀌는 것을 보여줍니다. 작품 속 여성들은 이 대회를 통해 각자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법이 개입하는 순간, 누군가는 이로 인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꿈과 멀어지는 차별을 받게 되는 겁니다.


PC의 문제는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는데 있습니다. 국내에서 페미니즘 운동 열풍이 불 당시 저는 페미니즘 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이 운동이 여성 인권을 신장시켜 남녀 간의 평등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큰 착각이었습니다. 국내 페미니즘 운동의 본질은 권력 이양에 있습니다. 기존 남성 기득권의 권력을 자신들이 대신 가져오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기득권이 쉽게 권력을 줄 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기득권은 젊은 여성과 남성이 싸우도록 유도합니다. 여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지만 그 정책은 여성의 삶에 특권을 부여하는 정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특권은 기득권 또는 기득권에 기생하는 여성들이 얻게 됩니다. 그 특권층에 해당되지 못하는 여성과 기득권에 해당하지 못하는 남성만이 서로를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게 현 대한민국 페미니즘 운동의 주소입니다.


여성이 남성을 향해 ‘한남’이라 말하는 건 과거 ‘김치녀’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집단적인 폭력을 미러링이라 포장하는 건 더는 먹히지 않습니다. 특정 계층이 기득권이 되고자 하는 건 또 다른 억압과 폭력, 차별을 낳을 뿐입니다. 미국 포르노 계에서도 이런 PC에 의해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포르노 배우 어거스트 에임스의 자살 사건입니다.


어거스트 에임스는 게이 포르노에 출연한 배우와 촬영을 거부하는 내용의 트윗을 올렸습니다. 이성과 포르노를 찍는 배우와 동일한 수준으로 성병 검사를 받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이에 다른 포르노 배우들과 PC를 지향하는 이들은 호모포비아라는 이유로 그녀를 공격했습니다. 어거스트 역시 양성애자였지만 이들의 공격은 끝이 없었고 결국 자살에 이르렀습니다.


그녀가 원래 가족 문제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 업계에서 소수자에 대해 조금이라고 불쾌한 의사를 표하면 매장당하는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최근 미국 포르노 계는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의 촬영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흑인 남성 배우와 촬영을 거부하면 그 자체로 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백인 여성 배우들이 흑인 남성 배우와의 촬영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거칠고 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레아 고티라는 배우 역시 흑인 남성 배우와 연애 중 폭력을 당했고, 이것이 업계 은퇴의 가장 큰 이유라고 합니다. PC는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성을 올바르게 이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개인의 의사표현 역시 막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세상에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설정한다는 점에서도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중세와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윤리관은 개인을 억압하는 절대적인 진리와 율법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 각 분야로 퍼지면서 이런 ‘절대성’은 ‘다양성’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PC는 다시 다양성을 절대성으로 묶고자 합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걸 선택하고 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폭력과 억압을 행하는 겁니다. 그들은 평등이 아닌 또 다른 권력의 이양을 보여줍니다.


경제학자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인간은 항상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을 묻고 이에 대한 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왔음을 지적합니다. 이 답은 누군가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 답을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영역입니다. 때문에 사회는 다수에 의해 그 답을 정하는 ‘극단적 공식화’의 모습을 보입니다. 정의와 답이라 여기는 걸 실현하기 위해 폭력과 억압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수단화하는 겁니다.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면 절대적인 진리와 가치를 강요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건전한 토론은 의미가 있지만 정의를 정해놓고 동의하지 않는 이를 적 또는 죄인으로 몰아가는 사회적인 풍토는 옳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세상에 PC, 정치적으로 옳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표를 원하고 더 많은 지지를 얻길 원합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보다는 상대적인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돈을 준다고 ‘나’를 사는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