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논의는 건강한 사회에서 나온다

2014년 연예인 황보는 자신의 SNS에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불만 글을 적은 바 있다. 당시 황보는 “경비 아저씨들에게 잘하려고 하지만, 우리 아파트 아저씨를 보면 그 마음이 뚝 떨어진다. 화난다. 화를 낼 수 없으니 화가 난다. 그냥 ‘내가 죄송해요’하는 게 낫다. 힘드시면 일 그만두셨으면 좋겠다. 주민에게 저렇게 짜증 내시지 말았으면 좋겠다. 경비 아저씨 눈치 보는 세상이 됐다.”고 썼다. 우리 동네 관리사무소에 불만이 많은 나 뿐만이 아니라 경비원과 불쾌한 일에 엮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내용이다.


헌데 황보는 이 글로 인해 큰 비판에 직면하고 글을 삭제해야 했다. 그 이유는 경비원이 분신해 숨진 서울 압구정동 S아파트에서 같은 날 입주민이 경비원을 폭행해 코뼈가 내려앉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2010년대는 갑질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던 때였고 경비원은 사회적인 위치에서 을의 입장이다. 황보의 입장에서는 개인이 겪은 사건을 개인적인 SNS에 적었을 뿐이다. 우리가 친구들과 누군가의 뒷담화를 나누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처럼 자신의 입장에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었을 것이다.


집단 심리학은 가족, 이웃, 학급, 직당 등 집단에 관련되는 심리, 행동,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집단 심리학의 범위는 사회로 확대할 수 있다. 사회가 지닌 ‘분위기’라는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두려움이다. 한때 한국사회는 이 두려움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두 번의 군부독재를 겪으면서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을 내뱉는 것보다 사회적 흐름에 따라가는 것이 옳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그 기류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런 집단의 두려움을 잘 보여주는 국가가 친절하기로 소문난 일본이다.


메이지 유신 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왕이 존재하는 국가였지만 종교적인 의미가 강했다. 무사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였던 일본은 오랜 시간 칼의 시대였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목이 날아갈 수 있었고,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오랜 자연재해도 이유라 할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이에 순응해야 하며 극심한 자연재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협력이 필수였을 것이다. 두려움으로 연결된 집단주의는 타인에 대한 친절함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강한 권위와 금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본은 아르바이트만 해도 먹고 살 수 있기에 ‘프리터’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국가다. 동시에 다수의 블랙기업과 권위주의에 찌든 직장문화로 인해 젊은 이들이 취업을 기피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국내에서 일본 취업 붐이 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나왔던 말이 ‘인구가 1억이 넘는 선진국가에서 왜 사람들이 취업을 하지 않으려 하는가’의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친절함이란 표면 속에 두려움이란 내면이 숨겨져 있다면 이것이 권위주의로 표출될 확률이 높다.


타인을 두려워 하기에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상황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권위와 폭력은 절대성을 지닌다. 어떤 논의를 하려고 하면 특정집단을 절대선 또는 절대악으로 만든다. 그리고 논의 자체를 폭력으로 간주하며 또 다른 폭력을 가한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다. 커뮤니티는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받는 아고라가 아니다. 애초에 인간이 사는 곳에는 절대적인 아고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커뮤니티마다 성향이 있다는 말이 나오는 건 이곳이 지향하는 절대선과 절대악이 있기 때문이다.


남초 또는 여초 성향이라 불리는 곳에 들어가면 그 기류를 읽을 수 있다. 인간이 모이는 곳은 어디나 사회가 되며 일정한 기류를 형성한다. 이 기류는 눈치라는 걸 준다. 특정 커뮤니티에서 의견을 낼 때 그 내부의 기류에 맞지 않으면 논의가 아닌 비난이 가해진다. 이는 커뮤니티를 즐기는 세대가 비판하는 꼰대문화가 그들 내부에서도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세 기독교 사회가 비판을 받았던 절대선과 절대악의 기준을 본인들이 가져오며 혐오를 부추겨 이 선을 더욱 공고히 만든다.


건강한 논의는 건강한 사회에서 나온다. 이 명제로 치면 인류 역사상 건강한 사회가 존재했던 적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사회는 기류를 만들었고 그 기류에 벗어나면 비판 또는 비판을 가장한 비난을 가했다. 경비원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개인적인 공간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당시의 기류와 맞지 않았다. 지금 내가 우리 동네 경비원에 대해 투정하는 글을 써도 마찬가지인 반응이 일어날 것이다. 경비원은 을이고 입주자는 갑으로 인식되니까. 이런 갑을의 구조는 일종의 선악과 같으니 말이다.


지난 3월 대선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한쪽은 남성의 생존권을, 다른 한쪽은 여성의 생존권을 주장하며 상대후보가 당선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했다. 마치 상대후보가 당선이 되면 다른 성별을 모조리 몰살할 거처럼 말이다. 심지어 방송에 출연한 패널이 인터넷에 올라온 말이라며 ‘이것은 생존권 문제’라는 발언을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방송이 대놓고 혐오를 조장하는 패널을 데려다 놨구나. 해당 패널은 차별금지법을 주장하며 동성애 혐오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무언가를 혐오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건 또 다른 혐오가 아닐까. 과거 동성애는 죄악으로 여겨졌고 또 질병으로 인식되었다. 동성애자들이 받은 차별과 이로 인한 사회적인 처벌은 분명 지워져야 할 순간이며 앞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범죄다. 다만 동성애를 싫다고 하는 것을 처벌해야 한다면 논의 자체를 없애는 것과 같다. 그것이 성역화를 내세웠던 중세의 종교사회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최근의 PC주의는 또 다른 성역을 만들며 성역과 반대되는 논의조차 금지하게 만든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방향성에 역행하는 모습이다.


예능인 김수용은 한 방송에 출연해 동성애에 대해 ‘그냥 싫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혐오할 생각이 없고 그냥 싫기만 할 뿐이란 점을 분명하게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못생긴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고, 키가 작은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다. 그건 개인의 호불호 영역이다. 누군가 날 싫어한다면 그 사람과 안 어울리면 그만이다.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놀리지 않고서야 싫어하면 어울리지 않으면 된다. 그 인식을 바꾸기 위해 그 사람을 가르치고 억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개인적으로 <트럼보>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이 작품은 냉전시대 당시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 트럼보와 그 동료들은 사회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할리우드에서 퇴출을 당한다.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고 자본가들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단체를 결성했다. 한 마디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냉전주의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자=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혀 사회적인 질타와 멸시의 대상이 된다. 이때 트럼보가 내세운 것이 ‘틀릴 수 있는 권리’이다.


사회는 우리가 숨을 쉬는 이 순간에도 변화의 가능성으로 꿈틀거린다. 생물과도 같은 사회에서 매 순간 틀린 사람이 낙인이 찍히고 공격을 당한다면(심지어 처벌까지 받는다면) 그 사회는 가장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통일 것이다. 집단 심리학의 측면에서 볼 때 한국사회는 고유의 정서인 ‘한’과 연결된다. 분노와 적개심이 도드라진다. 이를 풀어가는 방법은 논의지 성역화를 통해 절대화가 아니라고 본다. 한쪽으로만 부는 바람을 탄다면 그 끝은 절벽 또는 어떠한 진보도 이뤄내지 못한 제자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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