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바이러스가 등장하는 방법

층간소음 때문에 위층과 대화를 나누다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대화 자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말을 해도 못 알아 들으니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는 진중권 교수의 말처럼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듣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자기들이 아니라고 하더니 인정한 후에는 왜 자신들이 조용히 해주어야 하느냐며 화를 냈다. 문제가 있으면 경비실을 통해 전화를 하라고 하더니 전화를 받지 않아 올라가니 경찰을 부르겠다며 성질을 부렸다.


한 번은 소음이 어디서 나는지 세세하게 설명하고 조용히 좀 해달라고 하니 ‘싫은데? 조용히 안 해줄 건데?’라면서 조롱을 했다. 애가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여전히 쾅쾅 거리며 조용히 해줄 생각이 없다. 논리적인 설명도 감정적인 분노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한테는 소용이 없다. 위층에 올라가면 그 집 부부 표정은 나보다 더 화가 나 있다. 요즘은 스토킹법에 층간소음이 포함되어서 전화를 안 받아도 올라갈 수도 없으니 그 표정을 볼 수도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분노에 있다. 203호 가족은 인터폰으로 연락을 하는 것 자체에 분노를 느낀다. 이렇게 분노한 상대한테는 어떤 말을 해도 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는 기회를 노린다. 한 번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봐도 2층은 범인이 아닌 거 같아서 지하에서 나는 소리인가 해서 경비실에 도움을 요청했다. 헌데 경비실에서 2층에서 나는 소리인 거 같다고 기술자가 말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경비실이 2층에 연락을 했지만 예상대로 받지 않았다. 소리가 1시간 넘게 계속되어 결국 위층에 올라갔다. 그러자 위층 남자는 화를 내며 자기가 인정했던 소음까지 모두 왜 항의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냐며 분노의 재료로 사용했다. 한 가지만 걸려라. 내가 너한테 분노를 표출해 줄 테니. 그것이 요즘 일어나는 모든 사회적인 현상,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진 분노 바이러스의 등장방법이라고 본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는 ‘심심한 사과’로 시끄러웠다. 한 업체가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에 네티즌들이 ‘뭐가 심심하냐’고 반발하며 화를 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요즘 세대가 지닌 어휘력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대해 정지우 작가는 어휘력이 아닌 비난 자체의 문제임을 언급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한 단어로 정리했다. ‘악의적 오독’ 상대를 향해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말실수의 순간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가 이 주제에 대해 언급한 다른 사건은 이동진 논란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기생충>에 대한 한줄평을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고 평했다. 당시 논란이 되었던 건 ‘직조’라는 단어였다. 이 단어의 사용에 대해 비판이 가해진 이유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를 썼다는 어휘력 문제로 비춰졌지만 그 속마음에는 ‘진짜 평론을 하는 게 아니라 잘난 척하려는 마음으로 그런 어휘를 쓴 것이다’라는 마음이 있다는 점을 정지우 작가는 꼬집었다.


문맥상 틀린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님에도 ‘직조’가 욕을 먹은 건 이동진 개인에 대한 불만에 있었을 것이다. ‘빠는 까를 부른다’는 말처럼 인기가 많은 사람은 안티도 모으기 마련이다. 이동진은 대중의 입맛에 맞는 평만 한다, GV를 하는 영화는 무조건 좋게 평을 해준다 등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 비판을 가장한 비난을 받아왔다. 이동진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은 대중적으로 그를 무너뜨릴 실수를 노렸을 것이고 ‘직조’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는 ‘심심한 사과’와 비슷한 상황이다. 해당 업체를 신뢰하지 않는 네티즌들은 어떻게 사과문을 쓰는지 보자 했을 것이고 ‘심심한 사과’라는 단어를 보고 ‘어디서 심심한 사과를 해?’라면서 분노했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인터넷에 치면 바로 뜻이 나온다. 복잡하게 사전을 찾을 필요가 없고 스마트폰으로 어디서나 지식을 검색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어휘력 문제로 상대를 비판했을까.


이 문제는 오히려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이 대중을 기만하는 사과였다는 논란까지 번지고 있다. 까는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까기 위해서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이 논리에는 객관적인 판단이 중요하지 않다. 같은 뜻을 지닌 이들이 뭉쳐서 궤변을 통해 삼인성호(三人成虎)를 시도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지우 작가가 우려하는 건 사회적인 신뢰의 붕괴와 대화의 실종이다. 그는 대화의 실종에서 어휘만 남은 현상을 발견한다.


요즘 원로 정치인들이 방송에 패널로 나와 가장 많이 하는 소리가 ‘대화’이다. 요즘 정치를 보면 여야 간의 대화보다는 개인 SNS를 통해 여론을 선동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서 이뤄지는 것이 ‘상대의 악마화’다. 저놈은 악이다. 때문에 저놈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은 요즘 유튜브에서 이뤄지는 저격문화와 그 맥락이 같다. 상대를 저격하고 공격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인기를 끌고자 한다.


정지우 작가의 글은 현대사회에서 높은 피로도를 유발하는 말과 관련된 논란의 본질을 말한다. 그 어떤 시대보다 정보검색이 편해지고 지식의 독점화가 이뤄지지 않는 시대에 어휘력 문제는 소통을 저해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상대의 악마화와 비난을 위한 악의적 오독이다. 이 두 가지는 사회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건 물론 대화를 통한 소통 자체를 막는다. 203호가 대화 대신에 나를 악마로 여기고 연락 자체를 받지 않는 거처럼 말이다.


학창시절 정말 말싸움을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특징이 상대가 어떤 단어를 잘못 말하면 그 단어만 큰 소리로 반복하며 화를 낸다. 그러면 상대는 싸우기도 전에 기가 죽는다. ‘지금 네가 나한테 실수를 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 전략은 빛 좋은 개살구다. 그 친구는 말이 친구지 실상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닌 상대를 향한 비난과 악의적인 오독만 반복하는데 누가 좋아하겠나.


말이란 건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문장은 완벽해도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처럼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공격할 수 있는 게 말이다. 대화는 말과 말이 만나 최선의 답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다. 대화는 사라지고 어휘만 남은 공간은 SNS나 유튜브를 통한 일방적인 일침과 저격 그리고 소통을 가장한 통보가 지배할 것이다. 이런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살아가는 인간(人間)에게 적응하지 힘든 생태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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