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고 하늘을 원망할 순 없다



설정을 새로 정하기 위해 멈춘 소설이 있다. <내 마음은 항상 비>라는 작품이다. 3년 전에 구상을 끝냈는데 그때 작품의 배경이 일본이었다. 이걸 한국으로 바꾸려다 보니 무리가 있었고 다시 일본으로 바꿔서 쓸 예정이다. 일종의 자서전과 같은 내용인데 한때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정말 내 인생은 습하다 못해 흠뻑 젖어서 걷기 힘들 만큼 비가 내린다고. 노력과 반비례로 인생이 풀리지 않으면 혼자 우산을 쓰지 못한 기분이 든다.


이 작품의 주인공 A는 작가 지망생이다. 30대에 접어든 그는 현실과 타협해 사회의 일원이 된 친구들과 달리 여전히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 낭만이 아닌 자만처럼, 용기가 아닌 객기로 보이는 그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고 부모도 이해하지 못한다. 출판사마다 하는 말은 재능이 없지는 않지만 작품을 내기에는 부족한 수준이라고 한다. 노력이란 걸 얼마나 더 해야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숙제는 여전히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다.


그는 친구를 따라 지하 아이돌의 공연을 보러 간다. 18살의 지하 아이돌 B는 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그룹 내에서도 인기가 없다. 부모는 좋아하는 일을 지원해 줄 테니 하고 싶으면 계속 하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 터널을 나와 거울을 볼 때 자신이 꿈꾸었던 모습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이때의 만남을 시작으로 A와 B는 우연을 통해 몇 번의 만남을 가지게 된다. 물론 30대 평범한 무직남과 10대 아이돌이 로맨스에 빠지는 일은 없다.


이들은 서로에게 위로도, 기둥도 되어주지 않는다. 다만 꿈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한다. 꿈이란 건 어느 순간부터 치부처럼 느껴진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소리를 들을까 두렵고 이제 그만하라는 동정의 시선을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게 만든다. 청소년을 위한 단어처럼 느껴지는 게 꿈이며 어른은 목표를 지녀야 될 것만 같다. 아직은 더 꿈을 꾸고 싶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우산은 되어주지 못하지만 손바닥으로 머리 위를 가려준다.


이들의 결말은 반쯤 해피엔딩이다. A는 친구를 통해 한 출판사로부터 기회를 얻는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상관 없으니 출판할 수 있는 글을 가져오라고 하고 과거 첫사랑과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이 과정에서 다시 감정이 피어나고 수소문 끝에 과거의 그녀를 만나지만 과거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무명배우였던 아버지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녀는 첫사랑을 잊지 못했지만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처럼 ‘재능은 있다’에서 멈춘다. 굳이 출판사에 가서 결과를 듣겠다는 객기에 하늘이 웃다 울음을 터뜨린 거처럼 맑은 날씨에 비가 내린다. 텅 빈 자전거 보호소에서 비를 피하던 중 B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B는 연말 한 지방방송의 가요무대에서 솔로공연을 하게 되었다고 밝은 얼굴로 말한다. 사진 한 장으로 제2의 하시모토 칸나로 주목 받게 된 B에게 온 첫 번째 기회다.


하나의 공연으로 아이돌의 성공을 말하기 힘들다. 아이돌의 본고장인 일본에서는 10대 초반부터 많은 아이들이 아이돌에 도전한다. 메이저 그룹이 되어 추후 가수, 배우, MC로 성공하는 아이돌이 있는가 하면 지하 아이돌로 전전하다 TV에 얼굴 한 번 나오지 못하고 끝나는 아이돌도 부지기수다. 10대 후반의 나이까지 인기를 끌지 못한 B에게 온 특별한 기회이지만 이것이 성공을 암시하는 키워드는 아니다.


얼마나 많은 연예인의 제2의 누구라는 별명으로 데뷔했다가 사라졌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B가 미소를 보이며 이 소식을 전하는 건 자신에게 특별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남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을 꿈꾸는 A이기에 진심으로 B를 축하해 준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투고에 실패했음을 말한다. 이때 하는 말이 ‘비가 내린다고 하늘을 원망할 순 없지 않냐’이다.


학창시절 독특한 욕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 하루 살아서 빚 갚고 사는 것들아’ 그때는 몰랐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하루하루 벌어 빚을 갚으며 먹고 산다는 것을. 꾸준히 일하면 빚을 갚을 수 있기에 인식하지 않지만 그 친구가 했던 욕으로만 본다면 대다수의 삶은 맑은 날 하루도 없는 매일 소나기다. 매일 우산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함께 비를 피할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가족과의 여행 한 번, 연인과의 이벤트 하나, 친구들과의 모임 등 사소해 보이지만 특별한 기억들이 모이고 모여 빗속에서 춤을 출 수 있는 낭만을 선사한다. 꿈은 인생이란 필름에서 하나의 조각이다. 이후 어떤 장면이 찍힐지 결정하지만 게임처럼 원하는 장면을 찍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다음 조각 역시 소중하게 이어나가 인생이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이 삶의 목적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계속 쨍쨍할 수도 있고 비만 내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바라보는 관객이 있기에 찍어야 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관객이 있다면 영화는 상영해야 하니까. 처음 이 작품은 구상하게 된 건 대학원에서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처음 만난 동기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안 되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라고 했던 말이 비수로 박혔다. 그때 하늘을 올려다 보니 밤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하늘이 저렇게 웃고 있는데 내 마음에 비가 내린다고 원망할 수는 없지 않나.


요즘 그 어떤 때보다 강하게 우산을 쥐고 살아간다. 내 능력을 인정해 주는 이들이 있고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지고 있다. 개인의 영달보다는 믿음에 실망을 보내고 싶지 않다. A는 오직 자신을 위해 글을 썼다. 이건 과거의 나이다. 혼자이기에 우산을 놓고 싶기도 했던 때. 지금은 아니다. 다만 B와 같은 존재가 내게도 있다면, 그러면 조금은 쉼표를 찍으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분노 바이러스가 등장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