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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아내의 상자>와 여혐 논란

상자에 갇힌 여성, 그리고 남성

그런 작가들이 있다. 세밀한 묘사와 섬세한 표현으로 눈길을 끄는 작가들. 신경숙 작가나 은희경 작가, 김애란 작가 등의 여성작가들. 어린 시절에는 이런 작가들의 글이 너무나 싫었다. 에도가와 란포, 온다 리쿠,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이야기의 흥미가 짙은 작가들의 글에 비해 너무 심심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요즘 싫어했던 작가들의 글이 그 싫어했던 이유로 좋아질 때면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취향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아내의 상자>는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함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왜 여성 작가들은 저항하는 여성을 표현할 때 굳이 혐오감이 들 정도로 기이하고 흉측하게 묘사를 하는지, 정말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이쯤하고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이 작품은 신도시로 이사를 온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의 부부 사이는 딱히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이들 사이에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임클리닉을 다니는 두 사람. 이 불임클리닉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아내는 이웃집 강아지를 보고 와 성질을 낸다. 통통한 강아지와 깡마른 강아지. 깡마른 강아지는 같이 묶인 목줄 때문에 통통한 강아지를 쫓아다니고 그 집 아들은 강마른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지 막 대한다. 아들의 과자는 통통한 강아지 앞에만 떨어진다.


아내는 이 강아지 이야기를 하며 남편에게 말한다. 그 깡마른 강아지는 곧 굶어죽을 거라고. 죽는 날까지 통통한 강아지를 따라 다니다가 통통한 강아지가 크는 것까지 막으면서 죽을 거라고. 그러면서 그 쓸모없는 강아지가 왜 안 죽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개들은 자살 같은 걸 왜 안 하는지 모르냐며 말이다. 남편은 아내의 과격한 말에 당황한다. 아내는 이웃집 여자와 어울린다. 차를 타고 마트에도 가고, 카페에도 가고, 선물도 받고. 아내는 남편에게 이웃집 여자가 왜 당신한테 잘 대해주느냐고 묻는다. 이에 아내는 예상외의 거친 어조로 답한다.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남편은 아내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예술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상한 사람. 예민하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으며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그런 사람. 그래서 아내가 문을 잠그고 안 열어줬을 때도, 툭하면 잠만 자고 있을 때도, 상자에 무언가를 담을 때도 ‘그래, 저건 아내라서 그런 거야’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헌데 아내가 사라진 날, 남편은 당황한다. 지난 5년간 같이 살았던 사람인데 어디로 갔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내의 친구라고는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 그리고 인간관계를 통해 직업이나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뿐. 그게 남편이 아는 아내가 만나는 사람들일 뿐. 그녀가 어디에 가서 교통이 막혀 늦게 오는 것인지, 아니면 쇼핑을 마치고 영화를 보다 늦는 것인지, 연락이 오질 않는 한 남편은 모른다. 그는 아내의 동선 하나 파악하지 못한다. 이 순간, 작품의 중간중간 보였던 남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힌트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남편은 아내와의 잠자리에서 차가움을 느낀다. 그가 느끼는 아내는 차갑다. 그가 아내를 차갑게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파트로 이루어진 신도시의 집들처럼 이웃 사람의 얼굴조차 모르는 생활을 남편은 아내와 함께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대화에서 아내의 말에 남편은 대충 대답을 한다. 그는 아내가 가진 생각이나 그녀가 겪은 일에 자세히 개입하지 않는다. 그저 형식적인 반응만 해줄 뿐이다. 


그는 아내에 대한 역할을 강조한다. 살림솜씨. 그나마 괜찮은 살림솜씨. 그가 아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이 글에 드러나 있지 않지만 다들 짐작하고 있는 이유, 바로 불임이다. 이 글의 화자인 남편은 70년대 시골에서나 볼 법한 가부장적인 남편이다. 그는 아내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아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경멸한다. ‘한때 미술을 했던 아내는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이상한 존재’라고 치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런 남편의 가부장적인 모습을 대놓고 드러냈다면 너무나 촌스러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공간을 신도시, 아파트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아내를 비련의 주인공으로만 만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독특한 ‘캐릭터성’을 입힌 것이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작품의 제목인 ‘아내의 상자’ 어느 작품이나 제목이 절반을 차지한다. 제목은 작품 전체의 의미를 담아내며 작가가 글을 쓰는 방향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제목을 먼저 썼다면 글은 그 제목의 의미를 따라가야 하며, 글이 완성되어도 제목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제목은 글 전체의 내용과 주제를 요약할 수 있게 설정되어야 한다. 이 작품에서 제목은 아내가 하는 행동이다. 아내는 상자에 무언가를 담는다. 자신의 물건, 읽었던 책 등등을 상자에 담아 쌓아둔다. 아내는 왜 이것들을 상자에 담아두는 걸까? 마치 사진을 찍듯 자신의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싶어서일까? 짐을 싼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어딘가로 떠난다는 의미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필요해질 때까지 어딘가에 박아두겠다는 의미다. 이 작품의 의미는 후자에 가깝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가 잠에서 깬 아내가 마치 기계처럼 된장찌개를 끓여 남편에게 식사를 해주는 부분이다. 마치 기계처럼 말이다. 아내는 ‘자신’을 하나하나 포장해 감춰둔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아닌 ‘아내’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외롭다’ 이 한 마디가 아내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회사에서 뒹굴고 치열하게 싸워가며 무언가를 쟁취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치가 여기에 있고 이는 가정에서 자신이 인정받아야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반면 아내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존재다. 아니, 그녀에게는 존재 자체가 없다. 그저 ‘아내’라는 이름뿐이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아내는 ‘아내’가 되어야만 한다. 아이를 낳아야 하고, 집안일을 잘해야 한다. 그녀는 남편과 ‘소통’을 원하나 남편은 대충 아내를 대한다. 귀찮기 때문이다. 아내는 깡마른 강아지를 보고 자신을 생각했을 것이다. 통통한 강아지라는 남편 옆에서 신경질적이고 이빨을 내밀고 있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강아지. 아내는 왜 잠만 잘까? 깨어있어 봐야 깨어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백수하면 왜 만화책을 읽는 이미지가 떠오르겠는가? 수십 권의 만화책을 읽을 만큼 시간이 넘치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집안일을 제외하면 남는 시간, 그녀가 할 일은 없다. 책을 읽어도, 뉴스를 보아도 소통해 줄 사람이 없다. 유일한 소통구인 남편이 소통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웃집 여자와 어울리나 그녀 역시 외로운 존재다. 아내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웃집 여자를 알아야 한다. 이웃집 여자는 문화센터를 다니며 이것저것 만들지만 처음 만난 남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만큼 외롭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있고 강아지도 있지만 외롭다. 문은 많지만 들어갈 문은 없는 도시의 아파트처럼 소통할 문이 없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녀를 보며 알았을 것이다. ‘아이를 낳는 거, 남편에게 말을 거는 거,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니? 어차피 외로운 거’ 그래서 아내는 ‘그 사건’을 일으켰고 남편은 아내를 정신병원에 보냈다.


‘아내의 상자’라는 제목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자신을 상자에 담아 ‘아내’가 되어버린 아내라는 의미, 다른 하나는 아내를 정신병원이라는 상자, 즉, 아내가 자신의 행동에 의해 상자에 갇혀버리는 의미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은 남편에 의해 이뤄졌다. 작가가 남편을 화자로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성격을 문체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글의 초반 보여 지는 남편의 이미지는 그저 보통 남편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독자는 이 남자에게 짜증을 느낀다. 그는 교만하고 뻣뻣하며 마치 신처럼 아내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아니,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결말부에서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아내는 자신이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나올 수 없다고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남자가 원하는 건 단 하나다. 아내가 아내의 역할을 하는 것. 남편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한 그 순간부터 말이다.


그런데 작품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남자에 의한 여성의 폭력이 아닌 ‘사회’가 가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그 범위를 확장시킨 것이다. 아내는 과거 미술 시험을 볼 때 스웨터를 입고 간다. 그 스웨터는 목을 조이게 하는 스웨터였다. 시험에서 아내는 문에 신경을 쓴다. 문을 닫아달라고. 이미 닫힌 문을 닫아 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절규한다. 글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아내는 어떠한 이유로 미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여자라는 이유로 가해진 가족의 압박일 수도 있고(후에 아내가 전화 받는 일을 했다는 점에서 가족은 그녀에게 바로 돈을 버는 일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구조상 진출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내는 예전부터 이런 폭력에 노출되었던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예민함을 싫어한다. ‘자살’이라는 단어가 나온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생각한다. 이런 폭력에 민감한 자기 자신. 그저 모른 채 살아가면 되는데 자꾸 신경을 써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신의 모습을 그 깡마른 강아지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깡마른 강아지는 통통한 강아지를 이길 수 없다. 평생 끌려 다니고 비교당하다 죽을 것이다. 통통한 강아지는 남편, 깡마른 강아지는 아내. 그래서 아내는 상자 속에 자신을 담는다. 자신을 버리면 살 수 있다 여기기에. 자살 같은 건 아내도 하고 싶지 않기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딱 한 번 자신을 찾은 순간, 아내는 남편이 준비한 거대한 상자에 갇히고 만다. 이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우리 사회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져 온 부부 사이의 일을 노골적으로 들춰내는 일이다. 여성은 여성을 버려야만 살 수 있다. 외로움도, 지겨움도 모두 받아들여라. 그리고 남편에게 자신을 알아 달라 강요하지 마라. 남편은 피곤하니까. 이는 농경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사고가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화 사회에서도 바뀌지 않았으며 그 폭력은 여전히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고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보면서 ‘여혐’이라는 것이 나타난 사고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여성과 하위 계층의 남성들이 연대를 해 기득권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이다. 그가 이에 대한 근거로 든 것은 사회의 분위기와 남성의 계층 약화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더욱 큰 계층의 분화를 가져왔고 돈이 직위가 되는 세상을 만들었다. 문제는 이런 사회 속에서 남성 역시 돈으로 계층이 나눠지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위계층의 남성들은 기존 가부장 사회의 남성들이 가졌던 권력을 휘두르기 힘들어졌다.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데 어떻게 남성의 권위를 세울 수 있겠는가. 헌데 사회의 여성을 대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그러다 보니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이 권력을 휘두르는 대신 여성에게 주었던 몇 가지 편의가 계층이 낮아진 남성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여성의 ‘특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즉, <아내의 상자>에서 아내가 하나씩 자신을 포기해야 했던 ‘상자’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다포세대’라 칭하며 포기하는 것들과 같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포기해야 했던 것을 젊은 남성들이 겪으면서 똑같은 프레임에 걸린 것이다. 그러니까 외롭다는 말이 나오고, 멘토를 찾으며, 노오력이 부족하다는 말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아내 역시 외로웠고, 이를 잊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으며, 아내의 역할(노오력) 만을 강조하는데 분노했다. 난 ‘여혐’이 여성이 갇혔던 프레임에 남성들이 갇히면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한다. 남성이 할 수 있었던 역할, 그러면서 여성에게 강요할 수 있었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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