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리정원>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태어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강하고 건장하게 태어나나 또 누군가는 나약하고 약하게 태어난다. 이런 시작의 차이는 인생이라는 기나긴 마라톤에서 장애물을 넘느냐 못 넘느냐에 차이를 만든다. 더 빨리 장애물을 넘어 앞서가는 상대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난 혹시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 혹시 난 이들과는 다른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재연은 12살 때부터 한쪽 다리가 자라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벌목꾼이었고, 자신이 나무를 벤 것이 저주가 되어 아내를 잃고 딸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연은 남들과 다른 자신의 처지가 ‘나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점이 흥미로운 건 그녀가 엽록체를 통한 인공혈액을 만드는 연구를 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나무에서 태어났기에 엽록체로 숨을 쉰다. 그러면 인간은 더 이상 뇌와 심장에 의존하지 않은 자가 호흡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녀의 연구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연구를 응용한 후배 수희의 화장품 연구가 대박을 친다. 재연은 연구를 도둑맞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걸음걸이를 맞춰준 정교수를 사랑했고 새를 볼 줄 아는 그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온 숲속의 연구실인 유리정원을 그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연구 성과에 따라 연구소의 운명이 결정되기에 정교수는 어쩔 수 없이 재연이 발견한 엽록체 인공혈액을 통한 화장품 개발을 허락하고 수희와 사랑을 나눈다. 이에 배신감을 느끼고 유리정원으로 아예 들어가 버리는 재연. 그녀의 비밀의 숲에 문을 두드린 건 소설가 지훈이다. 소설 제목처럼 ‘언더그라운드’의 삶을 살아가던 그는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고, 자신을 폄하하는 대문호에게 표절문제로 시비를 걸다가 문단에서 아예 퇴출을 당한다. 여기에 뇌에 문제가 생겨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게 된 그. 그는 뇌를 향하는 동맥이 작게 태어나 생긴 문제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이사 온 집에서 벽에 적힌 문구를 보고 생각한다. ‘혹시 나도 나무가 아닐까?’
‘나는 나무에서 태어났다’ <유리정원>이 흥미로운 요소는 여기에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장애를 가진 두 남녀, 재연과 지훈이 숲속의 유리정원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지훈은 재연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인생을 통해 새로운 소설을 쓴다. 그 소설은 녹색의 혈액과 관련된 것이며 이는 ‘나무’와 관련되어 있다. 마치 ‘나무’처럼 인간과는 다르게 느리게 성장하는 두 사람-재연에게는 다리가, 지훈에게는 문학적인 성공이-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던 이 작품이 달라지는 지점은 지훈이 소설을 쓰면서다. 앞서 <명왕성>, <마돈나>에서 지나친 자극을 선보였던 신수원 감독은 ‘청정 드라마’가 될 것이라 여겼던 이 작품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린다. 감독은 재연과 지훈, 두 사람 모두를 집착과 욕망에 빠진 싸이코로 만들어 버렸고, 이는 지루하지만 잔잔하게 즐길 만했던 드라마를 부셔버린다.
이런 충격이 작품의 분위기와 차이를 만들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그런 충격이 주는 재미를 느끼기가 힘들다. 먼저 흐름이 너무 느리다. 이런 느린 흐름에서 마음을 울릴 수 있는 드라마가 펼쳐진다면 관객은 기대했던 상황대로 흘러가기에 안도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또 마지막 감동이 깊게 남기 마련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진행을 하면서 흐름마저 느리니 즐기기도 뭐하고, 느끼기도 뭐한 작품이 탄생하고야 말았다. 게임으로 비유를 하자면 좀비를 때려잡는 스릴 넘치는 총 게임인데 좀비가 너무 느리게 와서 긴장감 없이 지루하게 총질만 하는 그런 기분이다. 다음은 전형성이다. 감독 나름대로 충격 전개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관객의 예측 안에서 다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하면 뒤의 내용을 보여주고, 뒤에 이게 나오겠다 싶으면 다 그대로 펼쳐진다. 작품 속 현의 입, 그리고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나무에서 태어난 여자의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로운 소재인 거처럼 포장하지만 영화는 그 흥미의 절반도 쫓아오지 못한다.
감독은 왜 잔잔하게만 가도 좋을 작품에 이런 충격적인 전개를 택한 것일까? 자극이 좋다고 여겨서? 이런 방식의 흥행을 노려서? 개인적으로 난 이 영화가 ‘비판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서 재연이 가장 집착을 보이는 존재는 나무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가장 큰 요소는 ‘녹즙’이다. 특히 녹조가 가득 낀 강에 죽어있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자연에서의 ‘생명력’을 강조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장면들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숨겨야만 했다. 또 초반에 등장한 나무들의 모습이 마치 사람의 ‘무서운’ 얼굴처럼 생겼다는 점도 감독이 ‘자연’에 긍정적인 요소만을 담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출발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생각했다. 두 주인공이 가진 ‘상실’이 긍정적인 변화를 낳게 하는 요소가 아닌 부정적인 변화를 낳게 하는 요소라면 그들이 접하는 ‘녹색’ 역시 부정적인 색이 아닐지 하고 말이다.
재연은 마지막 남은 잎새와 같았던 정교수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세상과의 단절을 택한다. 그런 그녀가 끝까지 붙들고 있는 세상의 것이 녹색혈액이다. 그녀는 이 ‘푸른’ 색에 빠져 이것은 순수하며 고결한 인간의 삶을 연장시켜 줄 무기라고 생각한다. 헌데 이 무기가 거꾸로 그녀를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악한 ‘악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다’ 어쩌면 이 말은 너무나 순수하고 착하게 생각해 온 우리 국민들이 거꾸로 엄청난 악을 들여 지난 9년간 대한민국을 망친 주범들을 만들어낸 일을 비판한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친환경’의 경우 4대강 사업, 가습기 살균제 등등 환경을 앞세워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낸 사건들이 많다. 이런 풍자의 흐름으로 본다면 극이 향하는 극단, 지나치게 파괴되는 캐릭터들의 색깔과 분위기의 차이가 이해가 되기도 하다. 결국 아무리 순수하다 여겨왔던 그들 역시 무언가의 노예였고 집착을 반복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감독이 그런 결말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자연의 색을 고스란히 담아낸 아름다운 색체와 잔잔함을 천천히 뒤틀어 가는 묘한 힘은 작품이 가진 매력이다. 주제의식은 관객에 따라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다양성 역시 갖추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극의 재미를 느낄 만한 요소가 많이 부족하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재와 주제의식에서의 독특함이 전개의 신선함으로 이어졌다면 좀 더 많은 부분에서 재미를 느낄만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