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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럼 살아야지

영화, 그리고 세상 - 13. <얼굴>

<얼굴>은 <배틀 로얄>, <비 그치다>와 함께 2001년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을 수놓았던 작품이다. <배틀 로얄>과 <비 그치다>가 비교적 잘 알려진 유명한 작품인 반면 <얼굴>에 대한 언급은 드물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주제의식이 너무나 좋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들에서는 이야기하기 힘든, 또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오글거릴 수 있는 소재를 이 영화는 꽤나 코믹하면서도 음침하게, 그러면서도 강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30대 후반의 마사코는 못생기고 뚱뚱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버려졌다는 상실감과 술집에 나가는 동생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세탁소를 하는 집 2층에서 재봉틀로 수선하는 일만을 하며 외출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동물로 된 옷감을 수선하면서 초원 한 가운데에 앉아 동물들 사이에서 점심을 먹는 상상을 한다. 그녀에게 '행복'이란 굉장히 작고 소소하지만 환상적이다. 한 번도 제대로 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기에 상상의 폭은 좁고 현실 감각은 없다. 그녀는 돌아온 동생에게 무시당하고 동생은 한 번도 집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그녀를 모욕한다. 이에 화가 나 다짜고짜 집 밖으로 나가는 마사코. 기차를 타고 아무 역에나 내린 그녀.  하지만 신발을 신지 않고 나왔다는 것을 알고 허무하게 돌아온다.

마사코를 지켜주던 유일한 존재인 어머니가 죽으면서 여동생은 세탁소를 카페로 바꾸기를 선언한다. 여동생과 그녀의 남친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마사코. 어머니의 장례식 날, 여동생은 또 다시 마사코를 모욕하고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마사코는 여동생을 죽이고 만다. 충동적으로 여동생을 죽인 마사코는 부조금을 가지고 도망치나 여동생의 망령에 한동안 사로잡혀 고통을 겪는다. 운이 좋게도 대지진으로 도시가 어수선해지고 이틈에 마사코는 기차를 타고 도망친다. 기차에서 만난 이케다라는 남자. 그녀가 맨 처음 기차를 타고 나왔을 때 만났던 그 남자는 이후 세 번째 만남에서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다.

뚱뚱하고 못생긴 그녀는 세상 밖으로 나와 온갖 고초를 겪는다. 술 취한 남자한테 강간을 당하고, 일 하기 싫어했던 할머니한테 걸려 대신 모텔에서 일하게 된다. 모텔 주인한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모텔 주인의 자살에 당황하게 된다. 그녀에게 모텔 주인은 새롭게 나아가는 법을 알려준(자전거 타는 법)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비친 희망이 한 순간 절망으로 바뀌자 마사코는 '나도 더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라는 생각에 빠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에게 삶을 연장할 이유는 없다. 평생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다 보니 친구 하나 없고, 외모가 별로다 보니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없다.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동생을 죽인 살인범이다. 마사코는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줄이 끊어지고 그녀는 다시 삶을 이어간다. 우연히 만난 건달 같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의 누나가 운영하는 술집에 취직한다. 그러다 사랑하는 남자에 의해 몸을 팔게 생겼고, 그의 변심으로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라 여겼던 마사코. 하지만 남자는 야쿠자의 손에 죽는다. 다시 혼자 남은 마사코는 우연히 이케다와 다시 만나게 된다. 직장에서 짤린 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케다. 그는 마사코를 따라 술집에 오고 진창 술을 마셔 취한다. 마사코는 그런 이케다에게 살짝 마음을 보인다. 하지만 지진 때문에 멈췄던 경찰의 수사가 다시 진행되고 마사코를 향한 포위망은 점점 좁혀온다.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주제의식은 '살다'다. 우리는 가끔 살다 보면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대체 난 왜 사는 걸까?' 지금 내 꼴은 형편없으며 내가 한 공부,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너무나 허무하다. 이런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너무 힘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마사코는 '딱' 그런 인물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인물. 꿈도 희망도 없는 당장 자살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여자 말이다. 하늘은 그녀에게 삶을 '연장'할 기회를 두 번 준다. 첫 번째는 대지진이다. 대지진으로 그녀는 경찰에 붙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줄이 끊어진 장면이다. 그녀의 자살을 막은 건 자신의 변심이나 주변의 인물이 아닌 '하늘'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두 장면 있다. 이 장면들은 작품의 주제의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첫 번째는 마사코가 이케다에게 동물원에서 말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이케다에게 달이 서쪽에서 떠오르면 결혼해 달라고 말한다. 당황한 애까지 있는 유부남 이케다는 주저하고 마사코는 '빈말이라도 좋으니까 예라고 해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또 만나게 되면 그때도 약속해 달라고 물어보고 역시나 또 빈말로라도 이케다는 예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과 이케다가 이뤄지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이케다의 현대 폼이 처량해도 유부남인 그가 살인자에 못생긴 그녀를 좋아해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케다에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해 달라고 말한다.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무언가 미래가 있다면, 자신이 만나야 될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해야할 무엇이 남아있다면 삶은 이어갈 수 있다.


그녀에게 이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준 사람은 술집 주인인 사랑했던 사람의 누나다. 그녀는 마사코가 살인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것을 안 뒤, 전화로 그녀에게 말한다. 어떻게든 살아가라고.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는 자살하는 거라고 한다. 시간이 앞으로만 흘러가듯 인간의 삶 역시 계속 '살아가야' 한다. 어느 순간 죽고 싶다고 죽고, 다시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삶이 아니다. 이번 생은 틀렸다며 죽음을 택하거나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이유' 그 자체를 배반하는 행위다. 그래서 마사코는 살아간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살아간다.

그래서 난 이 영화의 결말이 좋다. '돼지가 튜브를 끼고 물에 뛰어든 이유' 그건 살기 위해서다. 삶이 기적인 건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있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어떠한 실패나 고통을 맛보더라도 행복을 느끼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뗄 수 있다. <얼굴>은 이런 삶, 특히 '살아있다'에 대해 아주 강렬하게 외치는 영화다. 보는 내내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별다른 기교 없이, 예쁘고 멋있는 배우 없이, 너무나 리얼하게 처절한 한 여인의 삶을 조명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영화보다도 강렬하게 인간을 부르짖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참으로 기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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