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수사와 금각사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이동했다. 열차 티켓은 한국에서 나고야 왕복 비행기 티켓에 맞먹는 값이었다. 1시간 20분 동안 기차를 타고 호스텔을 찾으며 점심도 먹고 했더니, 2시 넘어서 호스텔에 도착했다.
교토에서 유명하다는 그 ‘기온 시조’ 거리로 나섰다. 버스에서 내려 그곳으로 가는 길은 꽤 넓은 보도가 관광객들로 넘쳐서 밀려가듯 걸어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분명 일본식 전통 건물들이 잘 보존된 거리에 들어섰는데도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혼자인 데다 조금 지쳐서인지 그냥, 어서 이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같은 아시아에 인접국이어서 그럴까? 유럽 국가들의 도시만큼 눈이 번쩍 뜨이거나 신기하지는 않았다.
‘아, 다르구나’ 하는 정도.
내가 일본에 온 주된 이유가 히로시마에서 열린 닉의 콘서트였고, 거기서 보낸 3일 후에는 그냥 기분이 대체적으로 저조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조용한 일본의 호스텔, 차 안, 식당, 조용한 사람들의 분위기가 나를 무겁게 가라앉히는 건지도.
교토는 너무 상업화된 관광도시라는 느낌이 컸다. 내일은 청수사에 가서 고대했던 단풍을 봐야지.
청수사는 기대만큼 멋지지 않았다.
일부러 사람들이 적은 시간에 가려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지만 사진에서 본 것 같은, 아니 그 이상을 기대했던 내게는 그냥 평균이 좀 못 되는 풍경이었다. 게다가 절의 중심 건물은 공사 중이었다.
다만 수학여행 단 같은 한 무리의 남녀 학생들이 기모노를 입고 몰려다녀서, 사진 찍기에는 좋았다.
그렇게 조금은 실망해서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가 스타벅스가 눈에 띄어 들어갔다.
여긴 카페도 별로 없다. 일본 식당과 과자 카페는 비싸기만 하고.
그곳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에 금각사를 발견했다. 바로 앞에 금각사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50분쯤 버스를 타고 도착해 보니, 입구부터 단풍이 정말 선명하게 예뻤다. 그렇다. 교토엔 단풍을 보러 오고 싶었다. 이렇게 선명하고 고운 색깔의 단풍은 어디에서도 못 본 것 같다. 때가 맞았을까? 올해 유난히 예뻤을까?
청수사의 단풍은 이미 한 물 지나서 말라버린 느낌이었지만, 이곳 금각사의 단풍은 정말 어린 나이에 농염하게 피어난 혈색 좋은 여인 같았다.
바쁘게 사진을 찍으면서 입장권을 사서 들어간 곳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금각사 전경이 보이는 곳이었다.
와! 크고 아름다운 호수 너머에서, 금각사는 정말 거대한 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호수를 끼고 반바퀴를 돌면 낮은 산길로 이어졌고 그리로 올라가니 출구가 나왔다. 그렇게 한번 보고 그냥 나오기는 너무 아까워서 다시 내려가 이번엔 다른 쪽으로 반바퀴를 돌아 나왔다.
너무 상업화되어 버린 교토 시내는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호수 너머에서 금빛으로 환하게 빛나던 금각사와 그곳의 단풍은 충분한 보상이 되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타서 다시 갈아타고 오며 한 여고생에게 물었더니, 영어를 전혀 못해서 쩔쩔매며 웃음과 손짓으로 알려준다. 이 버스가 맞긴 하는데, 8 정거장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방향은 맞으나 오래 돌아가는 버스를 탄 것이다.
여행 중에 길을 묻는 과정은 늘 즐겁다. 상대방과 언어가 통하든 통하지 않든, 각각 나름의 재미난 에피소드를 만들게 된다. 그 소녀는 나를 만나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 아이도 나처럼 즐거운 미소로 그 순간을 기억할까?
내일 다카야마로 갈 버스 터미널을 알아 두어야 한다.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리셉션 걸에게 물었더니 바로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알아보는 동안 난 호스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핫초코를 뜨겁게 타서 컴퓨터를 들고 나온 그녀 옆에 앉았다. 추위 속에 종일 돌아다니느라 쌓인 피로를, 첫 모금에 싸악 녹여주는 핫초코.
너무 좋다고. 이게 정말 필요했었다고 기쁨에 취한 듯 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도 몹시 좋아했다. 좋은 기분은 늘 전염된다.
그녀는 자세한 버스 예약 정보와 아침에 호스텔 앞으로 대기할 택시 예약에, 택시를 타고 내려야 할 곳을 적어서 택시 기사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메모까지 써주고, 써넣을 것도 많은 기나긴 인터넷 예약 과정을 끝까지 다 해주었다.
인터넷으로 티켓을 예약은 했으나 실제 티켓 구매는 편의점에 가서 해야 하는데, 자기가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 이쯤 되면 친절의 끝판 왕이다.
편의점에서 표를 사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더니 너무 좋아한다.
“넌 지금까지 만난 게스트 중에 가장 다정한 사람이야.”라며.
맥주를 마시며 우린 많은 얘기를 했다. 미국에서 1년, 호주에서 1년 있었다는데 영어가 아주 유창했다. 스물여섯. 지금의 이 일과 번역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도 한국처럼 안정적인 직업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현재로선 파트타임 잡만으로도 부족하지 않다고.
그러면서 그녀가 물었다.
“지금 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해야 하는 거야?”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었다. 사실이다. 직업의 안정성도 물론 좋겠지만, 그것에 갇히게 되는 삶보다 자유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더 깨어있음을 요구하는 선택일 수도 있다.
이름은 미카, 난 그녀의 사진을 찍었고 우린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다.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에 대해, 여행에 대해, 내 딸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히로시마를 떠난 후 처음으로 많은 얘기를 했다.
사실 닉과도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떠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우리가 너무 오래 있다 돌아가자, 그녀의 동료는 우리가 실종된 줄 알았다고 걱정 반 농담 반으로 외쳤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려면 자기 전에 미리 짐을 꾸려두어야 한다. 복도로 캐리어를 갖고 나와 짐을 싸는데, 옆에 동양인 청년이 짐 정리를 하고 있길래 말을 걸었다. 한국 청년이었다.
지난번 일본 왔을 때 일본어를 못해서 힘들었는데, 돌아가서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이번엔 확실히 더 많이 늘어서 좋다고 했다. 여행은 이렇게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욕구와 동기를 주기도 한다.
지난번 일본 왔을 때 기모노 입고 돌아다니는 체험을 못해봐서 너무 아쉬웠는데, 내일은 꼭 해보려고 한다고 했다. 추울 텐데..
거리에서 기모노를 입고 돌아다니는 남녀를 보면 보기에 괜찮았었다. 옷 자체가 나름 화려하면서도 싸구려처럼 보이지 않았다.
전주 한옥마을 거리에서 한복 체험하는 여자들을 보며 기겁했던 기억이 있다. 개량 한복이라고는 하나, 그녀들이 입고 있는 한복은 모두 과한 레이스와 얇고 싼티 나는 재질, 그리고 그 디자인 등이 어우동 류의 한복들 같아서였다.
게다가 한복은 머리를 올리거나 묶어서 정리해 주어야 어울리는데, 풀어헤친 긴 머리에 얇은 레이스 한복이 끌리지 않도록 옷핀으로 올려붙여서, 실루엣도 망가지고 다리까지 드러나 보였다. 그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아름다움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한복의 변종들이 한복 망신을 시키는 것 같아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뭔가 개선책이 필요할 것 같다.
내일의 여행과 기모노 체험을 앞두고, 어린 한국의 청년은 설레는 것 같았다.
나는 내일 닉이 추천한 다카야마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