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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교토, 다카야마에서

- 일본여행

by Annie


호스텔 라운지에서 토스트에 커피로 아침을 먹고 나서려 했는데 택시가 10분 빨리 오는 바람에 그대로 나왔다. 미카가 적어준 쪽지를 보여주었더니 택시 기사가 딱 버스 승강장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그곳에서 다카야마행 버스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아직 시간이 30분쯤 남아서 난 카페를 찾아 터미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붐비는 카페였는데 샐러드와 빵 한 조각을 곁들인 모닝커피를 세트 메뉴로 저렴하게 팔고 있었다. 필요가 발명품을 만든다고 했던가? 터미널 안의 카페다운 좋은 발상이었다.


차가 연착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일본인데 다카야마행 버스는 30분 늦게 왔다. 다카야마까지는 4시간 정도 가야 한다. 이곳 고속버스는 좌석마다 벽면에 충전할 수 있도록 소켓이 있고 차 안에 화장실도 있다. 시내버스도 보면 좌석마다 벨이 있어서 내릴 때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서 불편 없도록 만든다.


버스 기사들은 물론 택시 기사들 모두 너무 친절하다. 불친절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내게는 그것이 진심에서 나오는 친절이든, 가식이나 기계적인 친절이든 상관없이 좋았다. 그 내막까지 까 뒤집어서 들여다보고 비판할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다.


교토에서 다카야마 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며칠 전에 눈이 내려서 산에는 눈꽃들이 피어 있었다. 버스 터미널 가까운 곳에 호스텔이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 돌아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름다웠지만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풍경이 색감도, 분위기도 더 예뻤다. 오후 늦게 도착했던 참이라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어두워지고 엄청 추웠다. 너무 추워서 발이 저렸고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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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먹어야겠기에 적당한 식당을 찾아보았지만 대부분 문을 닫았다. 알고 보니 6시가 되어야 저녁 오픈을 하는 것이다. 내가 들어간 식당은 18,000원을 지불했지만 맛은, 그리고 차림도 별로였다. 작은 생선구이 한 조각에 작은 미소 수프, 볼품없이 양이 적은 반찬 두 가지가 전부였다.


호스텔은 조용하다. 그 어느 곳보다 깨끗하기도 했다. 일본의 호스텔은 극단적으로 깨끗하다. 일기를 조금 쓰다가 잤다.

여행이 이렇게 심심할 수가..


다음 날은 일본의 알프스라고 하는 곳에 가서 케이블 카를 타는 일정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왕복 4시간에 교통비와 케이블카까지 타려면 비용도 많이 들뿐더러, 나는 오는 길에 온천에도 들르고 싶었다. 시간도 너무 빠듯할 것 같아, 궂은 날씨를 핑계로 난 가까운 온천만 다녀오기로 했다. 눈 쌓인 노천탕을 상상하며.


그런데 인터넷에서 검색했던 그런 온천이 아니었다. 지리산 온천보다 못한 실내탕, 야외탕 하나가 전부다. 다행히 그 온천 여탕에는 나 혼자였다. 멀리 눈 덮인 산이 보이고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노천탕에 혼자 있으니 참 느긋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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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버스 터미널 근처 편의점에서 와인을 한 병 샀다. 정 함께 할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마셔야지 하면서. 그래도 혹시 몰라서 작은 병이 아닌 큰 병으로 샀다. 6,500원이니 비싸지도 않았다. 여기선 그리크 제이콥스가 만원이었다. 한국에선 이만 원이 넘었었는데.

호스텔 라운지에서 접시에 바나나를 썰어 그 위에 요구르트를 올려 먹으며 와인을 마셨다.


그때, 두 남자가 옆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인사를 하면서 얘기가 시작되었었다. LA에서 왔고 롬은 필리피노, 샘은 홍키였다. 함께 여행 중이었다.

한참 얘기하고 있는데 브라질 가이, 구스타프가 합류했다. 그는 영어가 서툴렀지만 그래도 열심히 얘기를 했고 무서웠던 이집트 여행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우린 리셉션 걸도 초대했고 잠시 후에 뉴질랜드에서 온 청년도 합류했다. 오래간만에 그룹이 형성되어 마음껏 수다를 떨었다.


LA그룹이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고 했고 나도 저녁 먹으러 가야 했다. 롬이 어쩐지 피하는 것 같아서 함께 가자는 말은 못 하고 그냥 먼저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식당이 있을 만한 거리를 찾아 돌아보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한 바퀴 돌아 나오다가 그 LA그룹과 딱 마주쳤다. 어둡고 비도 내리는데 인적도 별로 없는 거리를 혼자 헤매기 싫어서, 내가 합류해도 되겠느냐고 거의 강요하다시피 해서 함께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샘은 회계사이고 롬은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일을 하는데 사진도 한다고 했다. 우린 많은 얘기를 했고 공감의 지점과 폭도 넓었다. 롬과 샘은 연인 사이이고 11년째 함께 지낸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외출하는 걸 꺼렸었나 보다.

내가 아는 필리핀 여성들은 모두 굉장히 해피하다고 했더니, 롬이 못마땅해하며 말했다.


"필리핀인들은 모두 그렇다니까. 필리핀을 봐.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데,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달리 불만스러워하지도 않고, 상관하지도 않아. 그저 상관없이 모두들 해피해...

그래서 발전이 없고 변화도 없는 거야. 그런데 한국을 봐. 난 그런 필리핀인들에게 진짜 화가 나."


자국민에 대한 애증이 그의 말에서 짙게 묻어났다.


샘은 롬이 자기와는 많이 다르다고 했다. 롬은 늘 화가 나 있다고. 또 자기는 규칙을 중요시하는데, 그때마다 롬은 왜 그래야 하냐고 되묻는다고 했다.

샘은 17살에 미국으로 갔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동양적 사고가 몸에 배어있는 친구였고, 착한 모범생이라는 게 얼굴에 그대로 써져 있다. 그러나 롬은 보다 서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렇지만 요리는 주로 샘이 하고 롬은 그가 요리를 하는 동안 소파에 기대앉아 티브이를 보거나 게임만 한다고 했다. 마트도 함께 가주지 않고 혼자 가라 한다고 샘이 불평을 털어놓았다. 나는 롬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Bad partner! 요리는 일이야. 함께 하면 놀이가 되지만, 혼자 하면 하기 싫은 집안일일 뿐이라고.”


그러자 롬이 인정하고 그 부분에 마음을 열겠다고 했다. 우린 유쾌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했다. 난 얘기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음식을 즐기지 못했지만, 얘기가 맛있었으니 그러면 됐다. 여행에는 이런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호스텔에 돌아와 세수하고 다시 라운지에 가서 와인을 따랐다. 한 걸이 차를 준비하고 있길래, 와인을 함께 마시겠느냐고 했더니 화들짝 반긴다. 말레이시아인이고 필리핀 마닐라에서 회계사로 일한다고 했다. 이름은 리즈, 여행을 많이 하고 있었다.


아직 젊은데 많은 곳을 다닌 걸 보면, 버는 대로 여행에 많이 투자하는 것 같았다. 우린 여행 얘기를 하면서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나중에 필리핀에 오면 연락하라고. 자기가 함께 돌아봐 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들어간 후에도 나는 조금 더 일기를 쓰다가 12시 넘어서야 자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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