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롬비아
나탈리가 추천한 워킹 투어를 해볼까 하고 다음 날 오전에 시간 맞춰 나가 보았다. 투어단은 20명이 넘는 대규모인 데다 모두 노인들이었고, 그곳에는 그런 투어단이 몇 개씩이나 모여 있었다. 게다가 아침 햇빛인데도 악 소리가 나게 뜨거웠다. 이 햇빛 속을 무리 지어 걸어 다니며 가이드의 끝도 없는 설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당연히 포기했다.
난 이곳의 역사나 어떤 건물의 유래 등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내가 본 것, 보았을 때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에 끌릴 뿐이다. 그리고 쉬고 싶을 때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쉴 수 있어야 했다. 필요하다면 석양 무렵, 햇빛의 열기가 식었을 때 택시를 타고 혼자 성에 가면 될 것이다.
오늘은 멜론 한 팩을 사서 들고 다니며 먹었다. 이곳에서 파는 과일 한팩을 먹으면 한 끼 식사를 한 것만큼이나 배가 부르다.
카페를 찾아 계속 맴돌았는데 옷 가게, 보석 가게, 고급 레스토랑만 보일 뿐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오래 헤맨 끝에 겨우 카페 하나를 발견했다. 작지만 깨끗하고 세련된 곳이었다. 아메리카노와 크롸상 한 개를 시켜놓고 앉아 며칠 만에 글을 쓴다.
조금 있으니 갑자기 카페가 붐비기 시작했다. 내가 카톡으로 그 말을 했더니 정우가 답을 보냈다. 그건 당연하다고, ‘와! 저기 예쁜 여자가 들어가네. 우리도 가보자’해서 사람들이 따라 들어간 거라고. 크크, 말솜씨 하고는.
그에게 카페 사진과 내가 시킨 커피 사진을 보냈더니, 마치 자기가 그 커피를 마시는 느낌이라고 했다. 순하지만 톡 쏘는 강한 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 같다고. 정확했다. 난 그의 미감과 취향을 좋아한다.
오늘은 멀리 보이는 성에 가볼까 하는데 거기는 어떻게 가야 할까? 건너편에 앉아있는 프랑스 남자에게 성에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가방에서 론리 플래닛 책을 꺼내 찾아본다. 정보가 부족한지 카페 주인에게 스페인어로 물어보고는, 15분 정도 걸으면 된다며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정오를 넘긴 땡볕이지만 걸어보기로 하고 용용하게 카페를 나섰다. 아침보다는 그래도 체감 햇빛이 덜 따가운 듯했다. 그러나 뙤약볕 아래서 고가도로 같은 긴 길을 걷고 나니 녹초가 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 성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건지, 이건 아니지 싶었다.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필요했다. 눈앞에 보이는 백화점 건물로 들어갔다.
도시마다 내가 시간을 보내는 형태는 비슷하다. 이젠 만나는 사람들의 유형도 비슷하다. 호스텔을 나서면, 걸어 다니거나 어딘가에 들어가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거나 해야 하니, 여행자들의 주머니는 끝없이 열린다.
햇빛이 덜 사나워지기를 기다리며 에어컨이 있는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여행지 검색도 하고, 메데진행 비행기 표도 끊었다.
에스컬레이터로 층을 오르내리며 쇼윈도를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다리는 무거워졌다. 4시쯤 백화점을 나와 바로 뒤에 있는 성으로 진입을 시도했다가, 도저히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해가 좀 더 기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그늘에 벤치가 있어서 그곳에 앉았다.
백화점보다 오히려 숨쉬기가 편안하고 바람도 설렁설렁 불어서 앉아있을 만하다. 한 숨 자고만 싶다. 그렇게 있다보니 빛이 조금 스러지는 것 같다. 10분만 더 앉아 있다가 올라가자.
성에 올라갔을 때는 거의 기진 상태여서, 카르테헤나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훌륭한 조망에도, 고풍스러운 성의 외관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사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곳은 산펠리페라는 성으로, 흔히들 생각하는 낭만적인 의미의 성이 아니라 일종의 요새였다. 원래 카르테헤나는 스페인이 남미를 침략해서 지배하던 시절에, 남미에서 빼앗은 자원들을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중요한 항구였다고 한다.
저녁에 일찍 호스텔에 들어와 샤워하고, 젖은 머리 그대로 테라스에 나와 앉았다. 습하지 않고 선선한 데다 분위기도 제법 호젓하다. 위아래 층 모두 하늘로 트여있는 구조라, 아래층 바의 음악이 가까이 들리고 바의 모습도 훤히 내려다보인다.
문득 딸이 키우기 시작한 강아지, 구름이가 보고 싶어 진다. 강아지란 게 참 묘하다. 어떻게 강아지가 보고 싶지?
어젯밤 30-40분 동안 마리화나에 대해 쉴 틈 없이 얘기하던 그 남자는 63세라고 했는데 73세처럼 보였다. 건강해 보이기는 했다. 누구든 새로운 사람만 보면 말을 거는 것을 보면, 구면인 사람들은 그를 피하는 것 같다. 그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어 친구가 없으면 정말 외롭겠구나. 외로워서 사람만 보면 말을 많이 하게 되는가 보구나. 젊음도 외로움은 있지만, 젊어서는 외로워도 그것을 방출하거나 몰입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많다. 그러나 늙어서의 외로움은 무중력 가운데 떠있는 느낌일 것 같다.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그들이 쏟아내는 말 또한 그렇다. 무중력 가운데 쏟아져 부유하는 의미 없는 글자들처럼.
나이를 떠나서도 사람들을 만나서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은 우선 내 말만 쏟아내기가 쉽다. 그러나 그러면 상대는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양자 사이에는 일방적인 스토리 텔링이 아닌, 서로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상대에게도 물어봐주는, 상대에게도 관심을 가져주는 그런 대화가 필요하다.
보통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과 얘기하거나 어울리고 싶어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또 그렇지 않으니, 세대 간의 소통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더 나이 들기 전에 마음에 맞는 동년배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 둘 일이다.
난 언제까지 혼자 하는 호스텔 여행이 가능할까?
얼굴이고 팔이고 검게 그을렸다. 이런 나를 볼 때면 집이 그리워진다. 내일은 또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까? 산타마리아에서 1박을 할 예정인데, 아침 8시에 출발하면 4시간 거리니까 정오에 도착할 것이다.
호스텔에 짐을 맡기고 민카에 갈까, 국립공원 비치에 갈까, 아니면 하루씩 두 군데 다 갈까?
그다음 날 오후 늦게 산타마리아를 출발해서, 카르테헤나에 돌아오면 늦은 밤이 되겠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메데진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러려면 7시 30분에는 호스텔을 나서야 한다.
집에 있으면 매일이 똑같아서 내일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갈 것인가에 대해 신경 쓸 것도 없을 텐데, 여행은 하루하루가 다음 날의 일정에 대해 생각하며 긴장해야 한다.
아래층 카페까지 이어지는 담벼락에 멋지게 늘어진 담쟁이넝쿨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행복하다.
정신과 몸과 그 안의 모든 세포들이 깨어있는 느낌. 바람도 시원하게 부는 이 밤, 이 깨어있음이 참 좋다.
갑자기 이 호스텔이 무한히 사랑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