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타페, 콜롬비아
간밤에 클럽에 갔던 탓에 새벽 4시에 잠들어서 아침 8시쯤 일어났다. 과타페행 버스에서 졸고 있는데, 옆에 앉은 여성이 뭐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내리라는 말 같았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관광객처럼 보여서 여기서 내릴 것이라고 짐작했던 모양이다. 밖을 보니 ‘엘 뻬뇰’이 보이고 많은 이들이 내렸다. 급히 가방을 챙겨 내렸다.
호스텔 위치가 엘 뻬뇰 근처이긴 하지만, 애초 계획은 체크인하기 전에 먼저 센트로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도 들르는 것이었다. 호스텔과 센트로의 거리가 2킬로여서 그렇게 하는 편이 더 좋은 동선이라 생각했던 것인데 엉겁결에 여기서 내리게 되었다.
내리긴 했는데 호스텔은 어떻게 가야 하나, 택시를 타야 하나 생각하며 두리번거리다 점심을 먹으며 알아보기로 했다. 바로 앞의 큰 식당들을 지나 더 아담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곳을 골랐다. 주인아저씨가 영어를 조금 하고 무척 친절했다. 송어 구이를 시켰다.
먼저 서비스로 수프와 레몬주스가 나왔다. 수프가 너무 따끈하고, 감자랑 완두콩이랑 야채들이 들어있어서 훌륭한 집 밥 같았다. 정작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송어 구이는 거의 통째 튀긴 것인데 조금 퍽퍽했다.
식당 주인에게 주소를 보여주며 호스텔 위치를 물었더니, 여기서 1km 정도 된다고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라고 했다. ‘걸어서? 이 짐을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더니 자기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차로 3분이면 간다고 했다.
‘참 친절하시네.’ 다 먹고 났더니 레몬주스를 한 잔 더 줄까 물어본다. 아니면 커피든. 생선 먹은 후라 개운하라고 커피를 청했다. 하지만 그의 커피는 너무 달았다. 나는 약간의 팁을 주었다.
그는 나를 호스텔 길목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내가 돈을 낼까 물었더니 활짝 웃으며 아니라고, 내일 점심 먹으러 또 오라고 했다. 그러겠다고는 했지만 수프 외에는 음식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고, 식당은 시내에도 많을 터라 다시 갈 것 같지는 않았다.
호스텔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니 한 여성이 인사는 하는데, 그녀는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체크인은 3시부터라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짐을 내려놓고 밖의 의자에 나가 앉았다.
바로 눈앞에 엘 뻬뇰이 솟아있고 아래로는 기막힌 호수 풍경이 내려다 보였다. 편안하고 쿠션도 있는 벤치에 앉아 풍경을 보고 있는데, 백팩을 멘 세 명의 남자가 들어선다. 그들은 내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더니 나처럼 다시 나온다. 우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에밀리오, 알바로, 산티아고라고 했다. 산티아고를 빼고는 이름이 생소해서 잘 입에 붙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엘 뻬뇰에 올라갔다 와서 센트로에 가보기로 했다. 이렇게 빨리 동행을, 그것도 세 명이나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엘뻬뇰에 가는 길은 잠깐씩 뜨거운 햇빛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그늘이어서 시원한 편이었다. 그러나 언덕길을 걷다가 너무 목이 말랐다. 입구의 가게에서 생수 두 개를 사서 하나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출발 전에 물을 마셨으니 하나면 되겠거니 하고. 그러나 평소 물을 잘 마시지도 않는 내가 홀라당 다 마셔버린 걸 보면 그들도 나처럼 목이 말랐을 것이다. 네 개를 사서 하나씩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계단을 오르기는 좀 힘들었다. 나중에는 조금씩 끊어서, 몸의 반동을 이용하며 걸었더니 좀 나았다. 먼저 올라간 그들이 내려다보며 나를 불렀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도 장관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즐거웠다. 우린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함께 셀카도 찍었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한 층 아래에 있는 바에 들러 나는 물을, 그들은 스파이시 비어를 시켰다. 스파이시 비어는 맥주잔에 매운맛의 '페허'라는 것과 소금을 바르고 그 위에 망고 두 조각을 올려놓은 것이다.
나도 한 모금 맛을 보았는데 약간 마르가리따 같은 맛이었다. 그다지 맵지는 않았다. 산티아고가 별 맛이 없는 맥주를 그냥 마시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했다.
그들이 내게 샌드위치를 먹겠느냐고 물었다. 그러겠다고 했더니 가방에서 주섬주섬 큰 식빵 한 봉지와 마요네즈, 치즈, 햄 등을 꺼내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니까 산티아고가 말했다.
“아르헨티나식 볼품없는 샌드위치를 사진으로까지!”
그 말에 우린 모두 키득키득 웃었다.
난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샌드위치 한 개를 다 먹고 나니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참치 한 캔을 꺼내더니 남은 재료로 샌드위치를 마저 만들어 먹었다. 난 너무 배불러서 사양했다.
그들은 또 마테차를 마실 건데 마시겠느냐고 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주섬주섬 물 담배 파이프 같은 것과 차 봉지, 그리고 나무로 된 컵을 꺼냈다. 보온 병과 함께. 마술 같은 가방이었다.
컵에 녹차 같은 차 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파이프 같은 것을 스트로처럼 이용해 돌아가며 마시는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렇게 친구들끼리, 가족끼리, 지인끼리 모여 앉아 마테차를 돌려 마신다고 했다. 독특한 친교 방식이었다. 마치 한국에서 술잔을 돌려 마시고 탕이나 국물을 함께 떠 마시는 것처럼.
산티아고나 에밀리오는 위트가 넘쳤다. 알바로는 진지하고 설명하는 것을 좋아해서, 서투른 영어로 내게 모든 것을, 열심히 진지하고 길게 설명했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에밀리오와 산티아고에게는 그것이 답답하고 지루할 수도 있을 텐데, 그들은 절대 알바로의 말을 중간에 자르거나 가로채는 법이 없이 잘 들어주며 지켜보았다.
6년째 독일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에밀리오는 다른 도시로 옮기고 싶어, 이번 기회에 휴가를 내서 긴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산티아고는 시간과 장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컴퓨터 프로그래머라 이 여행에 합류했고, 어려서부터 절친인 알바로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유해서, 콜롬비아를 20일 정도 함께 여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여행을 기획하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알바로를 아르헨티나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고 축산업도 병행하고 있는 사업가라서,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는 게 무척 어려웠던 것이다.
에밀리오는 무척 사교적이어서 길을 가다가 누구에게나 말을 걸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것 같았다. 엘 뻬뇰을 내려오면서도 한 커플에게 말을 걸어, 그들이 시내에 간다고 하니까 함께 가자고 청했다.
세 명이 정원인 툭툭 택시 한 대에는 그들 셋이, 그리고 다른 한 대에는 나와 그 커플이 함께 가기로 했다. 시내 여행사에서 투어와 액티비티 정보를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그 커플은 우리의 일행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떠나갔다.
우리는 작은 마트에서 술도 사고 고기도 사서 호스텔 그릴로 바비큐를 하기로 했다. 기타 치며 노래도 하고. 너무 좋은 계획이었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고 싶어 했는데 무슨 일인지 근처를 뱅뱅 돌기만 했다. 문제는 그들이 아직 환전을 못해서 신용 카드를 써야 하는데, 신용 카드를 받는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 더 일찍 말했더라면, 내게 현금이 있으니까 그걸 쓰면 되었을 걸. 나중에야 알고 내게 현금이 있다고 하니까, 신용카드 받는 곳을 한 군데 알아냈다며 거기 가자고 했다.
그런데 그 카페가 대박이었다. 야외 테이블을 이용했는데, 비치파라솔에 수술을 달고 안에는 크리스마스 장식 등 같은 것을 달아서 로맨틱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커피와 케이크를 시켰다. 난 에밀리오가 시킨 당근 케이크를 시켰다. 크진 않았으나 값도 싸고 맛이 좋았다. 1700원 정도. 카페 라테 맛도 이번 여행 중 최고의 맛이었다.
산티아고는 에스프레소와 케이크 대신 무슨 음료를 시켰는데 맛이 엄청 상큼하고 좋았다. 돌려가며 한 입씩 맛본 우리는 그 코코 레모네이드라는 음료를 모두 한 잔씩 시켜 마시며 감탄을 연발했다. 퍼펙트한 카페였다. 화장실이 있는 실내도 정말 깨끗했다. 나중에 또 와야지.
우린 맥주와 콜롬비아의 유명한 술,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와 소고기, 돼지고기, 감자, 양상추, 토마토 등을 사서 돌아왔다. 나도 그들과 바비큐 비용을 함께 계산하겠다고 했다. 또 그들에게 현금이 없으므로 택시비와 다음 날 시내에 나가는 택시비까지 내가 낸 후, 나중에 정산하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들은 이미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기타 연주를 하고 있었고, 남녀 한 쌍이 합류해 있었다. 알바로는 나무를 꺾어 계속 불을 피우고 틈틈이 요리 준비를 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 같았다.
산티아고와 에밀리오는 계속 기타 연주와 노래를 했다. 연주도 노래 실력도 모두 뛰어났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어디를 가거나 기타를 들고 다니며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내가 아메리칸 팝송을 즐겨 듣는다고 하니까, 그들이 몇 곡을 연달아 불렀다. 맥주와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를 번갈아 마시며, 어둠에 잠긴 호수와 엘 뻬뇰, 드문드문 켜진 조명들, 장작 불과 기타 연주와 노래를 즐겼다. 그리고 옆에서는 알바로가 조용히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고기를 재고 전자레인지에 찐 감자를 으깨 넣어, 마치 우리가 명절에 부치는 고기 전 만한 크기로 만들었다.
가끔 하늘에서 번쩍번쩍하던 섬광은 마른번개였다. 나중엔 한 방울씩 비가 내렸다. 그것도 좋았다. 비가 조금씩 더 내려, 그대로는 불을 더 피우기가 힘들 것 같았다. 다행히 테이블에 비치파라솔을 펼치고 그 아래로 모여 앉았고 화로도 그쪽으로 옮겼다.
파라솔 아래로 자리를 옮긴 후 에밀리오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산티아고는 옆에 서서 함께 노래를 하는데, 순간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이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 이 아름다운 호수와 산자락, 푸르게 빛나는 번개와 비까지 더해져서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비가 더 심하게 내려 파라솔로도 막을 수가 없게 되자, 우리는 호스텔 건물 입구의 테라스로 화로를 옮겼다. 알바로는 재어둔 소고기를 구운 후, 그 위에 상추와 얇게 썬 토마토와 아보카도를 얹었다. 그리고 그릴에 구운 또띠아로 감싸서 비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구울 때부터 소고기를 너무 오래 굽는다 싶었는데 역시 고기가 좀 질겼다. 나는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았던지라 삼분의 일도 채 먹지 못했다. 그러나 감자 구이는 먹기에도 부드럽고 맛도 좋았다.
그렇게 먹은 후 끝났나 했더니, 다시 돼지고기를 그릴에 구웠다. 돼지고기는 부드러웠고, 그 위에 살사 소스를 얹으니 맛도 훌륭했다. 배부르지 않았으면 조금 더 먹었을 터였다. 알바로는 요리도 그랬지만 치우는 것도 티 나지 않게, 하나도 힘들이지 않은 것처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테라스 위에 서서, 저 아래 어둠에 잠긴 호수와 그 위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정말 근사한 밤이었다.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밤,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