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타페, 콜롬비아
난 늘 일찍 일어나지만, 그제부터 잠이 부족했다고 하는 아르헨티나 친구들은 아침 늦은 시간에 일어나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커피 농장 투어를 위해 뚝뚝 택시 두 대를 불러 타고 시내로 나갔다. 그곳에서 투어 에이전시가 제공하는 택시로 산 중턱에 이르렀고, 거기서부터는 산길을 걸었다.
경치도 좋고 걸을 만했다. 투어를 하면, 특히 커피 농장 투어 같은 것은 가이드의 설명이 주를 이루게 된다. 나를 위해 영어 통역이 따라붙었다. 나이 든 할아버지였다. 그의 통역은 좀체 끝맺음이 없이 알아듣기 힘들었다.
보다 못한 에밀리오가 간추려서 통역을 해주고, 틈틈이 알바로가 느린 통역을, 그리고 산티아고가 간단한 통역을 해주었다. 결국 네 명의 남자가 다투어 내게 통역을 해준 셈이다.
사실 난 커피 생산 프로세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세세한 설명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투어의 과정은 재미있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오르내리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네 남자가 나를 케어해주고, 커피 시음도 하고.
시내와 산 중턱을 오가는 뚝뚝 택시는 에밀리오와 둘이서 탔는데 그는 내게 몇 가지 사적인 질문들을 했다. 나는 나의 퇴직에 대해, 두 딸에 대해, 남자 친구에 대한 그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또 올 가을에 한국 여행을 계획 중이라는 그에게 한국은 9월도 좋지만 10월에 더 아름답다고 말해주었다.
이상형의 여자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커뮤니케이션이 잘되고 자기에게 격려와 영감을 줄 수 있는 지적인 타입을 원한다고 했다.
한나절 걸린 투어가 끝나고 우린 시내로 돌아와 함께 돌아다녔다.
그들은 그곳에서 메데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카르테헤나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있었다. 난 ATM에서 돈을 여유 있게 인출했다. 늘 200~300페소(6~9만 원 선)씩 인출하다 보니 금방 돈이 떨어져서 조바심을 내곤 했기 때문에, 이번엔 600페소(20만 원)를 인출했다.
사실 그들에게 저녁도 대접하고 싶었다. 100페소 정도면 나에게 근사한 여행의 추억을 안겨준 그들에게 감사히 저녁을 대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들이 너무 비싼 것을 시키는 바람에(총 150페소) 불발되었다. 돈을 낼 수는 있었지만 너무 과한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으므로.
저녁을 먹고 거리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신 후 우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따뜻하게 포옹하며 서로 감사의 말과 다시 만나자는 기약을 하며. 아르헨티나에 오면 꼭 그들이 사는 멘도사에 들르라고도 했다.
이제 혼자가 되었다. 이곳 호스텔에 이틀을 연장했으니, 호젓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원래는 살렌토에 갈 예정이었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먼 곳까지 가서, 트래킹까지 하기에는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포기했다. 물과 웨하스, 바나나 두 개를 사들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들과 포옹할 때 머리에 끼워둔 안경이 떨어졌는데, 그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침대에서 깔고 앉은 건지 안경알 하나가 빠져버렸다. 아무리 끼우려고 애써 봐도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한쪽만 끼고 한쪽 눈을 감고 보려니 이건 아니다. 여행하며 안경점이라곤 보지 못했는데, 게다가 마침 시간이 나서 글을 쓰려던 참이었는데 참 난감하게 됐다.
호스텔 라운지 밖 테라스에서 안경과 씨름하고 있는데, 저쪽 어둠 속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아무래도 남자가 이런 일엔 더 낫겠지 싶어서 다가가 부탁했는데 마침 그도 안경을 끼고 있었다. 불이 밝혀진 로비로 들어가서 그는 조심스레 이렇게 저렇게 안경알을 끼워보려고 애썼다. 그는 자칫 안경테를 부러뜨릴까 봐 걱정했다.
나는 어차피 못 쓸 거라면 그래도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어느 순간 '딱'하는 소리가 났다. ‘부러졌나? 끼워졌나?’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순간 아찔했다고 했다. 고쳐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12시를 넘겨서까지 얘기를 계속했다.
독일인인데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과학 연구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은 많고 급여는 박한 편이어서 일을 그만두고, 지금은 당분간 부모님 집에 들어가 함께 사는 중이라고 한다.
처음엔 그가 말아서 피우고 있는 것이 타바코인가 했는데, 마리화나라고 했다. 여기서는 불법이라 조심스럽다고 말은 하지만 그는 체인 스모커였다. 그의 영어는 유창한 편이었지만, 말꼬리가 흐릿한 데다 감기로 코맹맹이 소리까지 내고 있어서 알아듣기가 좀 힘들었다. 막 신명 나는 시간은 아니었으나 적적하지 않은 밤이긴 했다.
난 먼저 자러 들어갔다. 룸에서는 초저녁부터 한 남자가 자고 있었다. 난 쉽게 잠에 빠져들었고, 자다 깨어보니 옆 침대에 한 남자가 들어와 자고 있었다. 그는 자면서 숨소리도 크고 약간 끙끙대기도 했지만 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아침에 깨어 얼핏 보니 어제 함께 얘기했던 그 남자인 것 같다. 친구랑 왔는데 친구는 일찍 들어가 잔다더니 그게 이 방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