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타페, 콜롬비아
이른 아침 밖으로 나와 보니, 호수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작은 언덕 위에 정자가 보이고, 줄기와 잎이 넓게 퍼진 나무들도 한 그루씩 서있다. 나지막한 산허리에는 드문드문 집들이 하나씩 박혀 있는데, 모두 B&B나 호스텔일 것이다.
때마침 나룻배도 한 척 지나간다. 한 폭의 채색 수묵화 같다.
오전 내내 테라스에 머무르며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를 보기도 하고, 그간 밀린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늘진 자리의 바람에 추워지면, 자리를 옮겨 등에 햇빛을 받고 앉아있기도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어제 사온 바나나 한 개와 웨하스 한 통을 먹고 나니 슬며시 졸음이 밀려온다.
저기 아래 호수 가까이에 두 명의 걸들이 타월을 깔고 앉아, 마치 비치에 온 것처럼 햇빛을 즐기고 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고 부럽기도 하다. 난 저렇게 나를 햇빛에 노출시킬 수는 없다. 아무리 그 모습이 좋아 보여도.
2층 방으로 올라오니, 거기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 풍경이 좋다. 그렇게 침대에 엎드려 글을 쓰다가, 졸려서 한 숨 잘까 하고 누웠다. 창문 밖 테라스에는 또 다른 걸이 타월을 깔고 누워 햇빛을 즐기고 있다. 여러 명의 걸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렇게 호스텔에 머물며 편안함을 즐기고 있었다.
손톱깎이가 필요하다. 보고타에 두고 온 캐리어 안에 작은 손톱깎이가 있다. 여행 떠난 후로 딱 한 번 썼는데 필요한 시기에 옆에 없다. 손톱은 길러본 중 가장 긴 상태이고, 한 개는 두어 군데 부러져 있기까지 하다. 보고타로 돌아갈 때까지 못 참을 것 같다.
여행하다 보면 작은 것이 긴히 필요할 때가 있다. 샤워젤도 동이 났는데, 이곳에선 사보려고 해도 영 보이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작은 비누를 한 개 샀다. 클렌징 폼도 떨어져 가는데 미리 사두어야겠다. 여행 초반 너무 많아 가방을 차지한다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샴푸며 영양 크림 샘플들도 이제는 부족할까 봐 조금 걱정이 된다.
그렇게 방에 누워 몇 분이나 잤을까, 팔이 저렸다. 일어나 보니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나갔다 와야지 생각하며 주섬주섬 준비를 했다. 그냥 나가지 말고 이렇게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대로도 너무 좋으니까.
계속 호스텔에서 게으름 피우면서 있고 싶었지만, 내일도 있으니 오늘은 어쨌든 시내에 다녀오자.
호스텔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지난번 갔던 그 카페를 찾아가, 지난번과 똑같이 카페 라테와 당근 케이크, 그리고 코코 레모네이드를 시켜서 배불리 먹었다.
시내는 크지 않았지만 구석구석까지 걸어 다니다 보니 나중엔 몹시 피곤해졌다.
사람은 아쉬울 때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말을 건다. 내가 현재 충분하다고 느낄 때, 옆에 함께 할 사람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게 되고 그들에게 말을 걸지도 않는다.
어제 안경 렌즈가 하나 빠지는 바람에 만나게 된 스테판과 그의 친구 알렉스가, 오늘 저녁에도 나와 함께 얘기하며 시간을 보낼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난 오늘 새로 온 룸메이트에게 좀 더 말을 많이 걸었을 것이다.
어제까지 아르헨티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았더라면, 또한 호스텔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말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이틀이나 동행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말을 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그러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사교의 한계이기도 하다.
나와 스테판, 그리고 알렉스는 어두운 호수를 바라보고 앉아 사회, 정치, 세계, 환경, 그리고 유튜브나 팟캐스트의 영향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렉스는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사원이었는데, 너무 많은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무엇을 하면 행복할지에 대해 생각해보니, 자기가 비행을 좋아하는 것 같더란다. 그래서 행글라이더 조종사가 되어 조종도하고 강의도 한다고 했다.
회사에 있을 때 만나는 사람들은 만나서 하는 얘기가 업무와 관련된 것들이었고, 일은 고객들의 불평과 요구를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즐겁게 행글라이딩을 하고서 착지하면, 고맙다며 행복한 얼굴로 떠나간다고 했다.
처음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의 삶에 그는 아주 만족한다고 했다.
두려움은 우리를 좀먹는다. 두려워서 하고 싶은 일보다는 안정된 직장을 찾고, 또 그에 앞서 그것을 목표로 전공을 선택한다. 두려워서 지금도 살 만하지만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지금은 혼자 사는 것이 만족스럽지만 두려워서 결혼을 하고, 또 그런 이유로 아이를 낳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살면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는 이런 두려움이 크게 작용한다.
이곳 과타페에서 눈앞의 엘 뻬뇰, 그 정상에 켜진 불빛을 바라보며, 호스텔 앞 호수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개구리 우는 소리와 개들 짖는 소리를 들으며, 공책이 축축해지도록 이슬이 내리는 이곳에서 글을 쓴다. 하루를 돌아보며, 여행을 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