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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뻬뇰 호수에서의 글램핑(2)

- 과타페, 콜롬비아

by Annie


아침 일찍 눈을 떠서 밖에 나가보니,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난 한 걸이 저 아래 호숫가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한참 뒤에 올라온 그녀는 몹시 추워했다. 5시 반에 일어나 호수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어둠이 밝아오는 과정을 다 지켜보았다고, 아주 좋았다고, 엄청 추웠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했다.

아! 대단하네. 난 사진 찍는 것에 게을러서, 심지어 카메라는 보고타에 두고 왔는데.


나도 호숫가로 내려가 보았다. 데크 위에 한 여자가 엎드려서 글을 쓰고 있었다. 얼굴이 동양 여자로 보였다. 휴대폰으로 풍경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느 순간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였다. 데크 위에 벗어놓은 옷들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누드인 것 같았다. 수영을 끝내고 돌아온 그녀는 한참 동안 벗은 채로 데크 위에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 과정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두었으면 참 근사했을 텐데, 몰래 누드 사진을 찍는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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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으며 새로 아르헨티나에서 온 남자와 짧게 얘기를 나누었다. 이곳에서 며칠 묵는 동안 난 이곳 토박이라도 된 듯, 새로 온 이들에게도 조금은 심드렁해지고 별로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의례적인 이야기만 나누고 돌아선다.


아침을 먹은 후 등에 햇빛을 받으며 카톡을 하다가, 호수 아래로 내려가 보니 대나무 그늘이 보였다. 난 뛰어 올라가 짐을 챙겼다. 큰 타월과 휴대폰 보조 배터리, 어제 사온 먹 거리(아보카도, 바나나, 물, 견과, 요거트), 마스크, 공책과 펜, 스페인어 미니 북 등.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매일 이러고 살면 이도 재미없어질까? 한 방을 쓰는 런던에서 온 걸이 그쪽으로 합류했다. 조금 있으니 다른 두 걸이 수영을 하러 내려왔다. 그들은 거의 호수 맞은편까지 수영해 나갔다.

난 물에 뛰어들려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그들을 불러서, 나를 보게 한 후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어디든 물이 있으면 수영복을 입고 뛰어들곤 하는 여자들이 부럽다. 한국에 돌아가면 수영을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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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요거트에 바나나, 크래커 한 봉지를 다 먹어간다. 콜롬비아에서 보기 흉할 정도로 뱃살이 붙었다. 아침에 정우와 카톡을 했다. 우리 동네 아웃렛에서 근무하던 여성이, 태국 여행을 다녀온 후 코로나에 감염된 모양이다. 걱정되어 딸들과도 카톡을 했는데, 병약자가 아닌 경우에는 감염이 되더라도 그냥 일반 플루와 다름이 없다고 했다. 다만 감염되기가 쉽고 그 속도가 무척 빠르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라고.


정우는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좋긴 하지만, 내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이 조금 슬프다고 했다. 1시간만 그 호숫가로 순간 이동해서 함께 낮잠을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를 피해 도망 온 여행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나의 여행을 함께 기뻐해 주고, 지지해주고,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사실 사람들은 타인의 여행에 별 관심이 없다. 여행 사진을 전달받아 보는 것도, 소식을 듣는 것도 심드렁하고, 때로는 샘도 나고, 여행 상황이나 사진들을 보기 싫어지기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즐거울 때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내가 지치거나 지루해할 때 격려해주며 한 발 더 나아가도록,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라고 말해주고, 어려움이 있으면 온 힘을 다해 도우려 애를 쓴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가 내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그는 늘 그랬다.


자리를 호숫가에서 방 옆 테라스로 옮겼다. 이 테라스도 난간이 뚫려 있어서 호수가 다 내려다보인다. 풀 위처럼 축축하지도 않고, 그늘도 완벽해서 훨씬 편안하다. 곤충이나 뱀이 나올 걱정도 없다.

테라스에 잠깐 나온 옆 룸의 한 남자가 나를 보고 말한다.

“Nice glamping!”

그러네, 멋진 글램핑이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네.



콜롬비아 - 1 (119).jpg 2층 테라스에 타월 깔고 누워 뚫린 난간으로 보이는 풍경


어제 사온 머리 통 만 한 아보카도를 호숫가에서 조금 먹다가, 부엌에 가서 깎아 그릇에 담았더니 수북하다.

청소와 부엌살림을 도맡아 하는 아주머니에게 조금 나누어 주었다. 마침 그녀의 딸이 와있어서 함께 먹으려고 점심을 준비 중인 것 같았다. 그녀가 파스타에 크림을 넣은 건데, 내게 좀 먹겠느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밍밍한 아보카도에 파스타 간이 약간 배어서, 맛이 훨씬 나아졌고 근사한 한 끼가 되었다.


종일 그렇게 자리를 옮겨가며 뒹굴거리다 저녁엔 별로 할 일이 없어져서, 이른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에 갔다. 오븐에 구운 닭요리를 시켰는데, 커다란 닭고기에 밥과 소스를 곁들인 붉은 콩, 샐러드까지 양이 삼인 분 정도 되어 보인다. 은근히 중독성 있는 맛이어서 그 많은 요리를 거의 다 먹었다.


사실 종일 크래커와 견과류, 아보카도와 약간의 파스타까지 먹고 빈둥거린 터라, 배도 고프지 않았던 참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많은 양의 저녁을 또 먹었다.

이렇게 먹고 뒹굴었으니, 앞으로 남은 여정이 덜 힘들까?


내일은 이 글램핑을 접고 보고타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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