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타, 콜롬비아
보고타로 돌아가는 게 꼭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존이 있고 제임스가 있고, 그리고 돌아오면 함께 춤추러 가자고 했던 니키타가 있는 곳. 그들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메데진 공항에서 제임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고타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아직 거기에 있냐고.
보고타의 호스텔에 도착한 후, 다시 거리로 나와 배회하는 동안 그에게서 답이 왔다. 그는 다른 동네의 다른 호스텔로 어제 옮겼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사이타 호스텔까지 가기에는 너무 피곤한데, 내게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겠느냐고 했다. 만나서 함께 돌아다니며 얘기도 하자고. 결국 트램을 타고 내가 그쪽으로 가기로 했는데, 날이 추워서 호스텔에 들러, 따뜻한 카디건도 챙기고 저녁을 먹은 후라 양치도 해야 했다.
호스텔로 돌아갔더니 니키타가 있었다. 우린 반가운 포옹을 했다.
“제임스를 만나러 갈 거야, 근데 얼마 안 걸릴 테니, 갔다 오면 함께 춤추러 가는 것 맞지?”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내일 아침 7시 버스로 떠난다고 했다. 좀 있다가 존이 일을 끝내면 함께 한 잔 하러 가기로 했다고 한다. 내가 제임스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조금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결국 한 시간 후쯤에 존의 일이 끝났다고 해서, 내가 제임스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그럼 그냥 거기 있을 거냐고 물었다. 아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약속 장소를 정하던 제임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래서 제임스에게 제안했다. 이쪽으로 와서 우리랑 합류하면 돌아가는 택시비를 내가 주겠다고. 그가 오겠다고 했다.
짧은 치마의 맨다리에 두툼한 카디건을 걸친 채, 나는 존과 니키타를 따라나섰다. 존은 표정이나 말이 차분한 사람이다. 생각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사업인데, 사업 아닌 친구 접대하듯이 호스텔을 운영하는, 그래서 오늘 니키타의 송별회에 내가 함께 하는 것에 대해서도 흔연스러워하는 것 같다.
난 좀 전에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니키타랑 나누어 마시라고 맥주 6병을 사서 갔고 존은 무척 좋아했다. 니키타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고 조금 수줍음이 있는 청년이다. 코에 피어싱을 하고, 귀 위쪽 머리에 물고기 형상의 문신을 하고 있어서 약간 히피처럼 보인다. 스페인 출신인데 런던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영어는 약간 웅얼웅얼거리는 듯해서 알아듣기가 쉽지는 않다. 그는 첫날부터 내게 무척 친절했고, 말이 많은 제임스에 가려져 분위기를 주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자기표현을 하고 싶기도 한 것 같았다.
바에 가는 길에 한 일식집에 들어갔는데, 실내 인테리어에 일본색이 정말 강했다. 실제 일본에 있는 식당들보다도. 그곳 바에서 술을 마시나보다 했는데 잠시 후 그곳에 존의 여동생, 스테파니가 나타났고, 우리는 함께 그곳을 나왔다. 그녀가 그곳에서 일한다고 해서 알바를 하나보다 했는데, 그 가게를 직접 운영한다고 했다.
어려 보여서 대학생쯤 되는 줄 알았는데 벌써 서른한 살이라고 했다. 오누이의 사이가 참 좋았다.
거리는 벽화들이 가득하고, 작고 다채로운 상점과 바들이 있는 흥미로운 곳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우리가 들어간 바는 정말 신기방기한 곳이었다. 자그마한데 약간 붉은 조명에, 온 벽과 천장에는 가지각색의 조형물과 그림들이 빽빽이 들어 차있어서, 정말 눈이 휘둥그레지는 곳이었다.
음악도 빵빵했다. 바의 분위기도 좋고, 함께 있는 사람들도 정겨운데 단 한 가지, 이들이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다 보니, 난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게 흠이었다. 하지만 난 또 그대로의 그 분위기를 즐겼다.
한참 후 제임스가 친구를 한 명 데리고 왔다. 왁자한 제임스의 등장이었고, 잠시 후 그의 친구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안녕하세요.”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한국인일 줄은 미처 몰랐다. 제임스가 한국계 미국인이라 그도 그런가 별 관심 없이 봤던 것이다.
남미 여행 중, 1년째 이곳 콜롬비아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건설 회사에 조금 다녔었는데, 적성에 별로 맞는 것 같지 않아 다른 일을 해볼까 하고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했다. 스페인어를 익히며 사업 아이템 같은 것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의 인구 감소가 심각한 상황이라 결국엔 이민자들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텐데, 이곳 콜롬비아인들이 그 수요가 될 수도 있고, 그러면 그들이 한국어를 배워야 해서, 그것에 대해서도 생각 중이고 무역 쪽도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라 했다.
제임스에게 택시비로 20페소를 주려하니 그는 극구 사양했다. 한국에 가면 잘 부탁한다고. 나는 그 20페소를 옆에 앉은 한국인 손에 쥐어주었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내일 맛있는 점심을 사 먹으라고 했다. 그는 한사코 자기도 돈 있다며 괜찮다고 했지만, 한 번이라도 마음 편하게 밥 사 먹으라며 기어이 그 돈을 주었다.
“외국에서 고생하니까”라고 말하면서, 잠시 목이 메일 뻔했다. 그도 그런 것 같았다. 동포라는 것이 이런 건가 보다.
호스텔 도미토리에는 나와 니키타 둘 뿐이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침대에 불 끄고 나란히 누워서 우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새벽 3시 가까이 되었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는 니키타는 6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24시간에 걸친 버스 이동이니 뭐 굳이 잠을 청해야 할 것도 없었다.
조금 추워하는 내게 그는 자기 침대의 이층에 있는 담요를 내려와 내게 덮어주었다. 그것이 무척 다정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내 어깨도 훨씬 따뜻해졌다.
그는 런던에서 차 정비 일을 한다고, 이 여행이 끝나면 또 런던으로 돌아가 몇 달 일을 하다가 또 여행을 하고, 한 동안은 그렇게 지낼 것이라고 했다. 또 한국에도 가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고, 가게 되면 미리 알려주겠다고도 했다.
우린 불안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감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의 수줍은 성격에 대해, 그로 인해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의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나는 내가 여행을 떠나온 것이 도망치기 위한 것이었다고, 처음엔 도망이었는데 지금은 이 여행이 너무 좋다고 했다.
여행 중에, 중남미 남자들의 블론드 걸 선호에 약간 위축되었다는 이야기, 한국에 친구들이 별로 없다는 등의 얘기를 하자 그가 말했다. 블론드가 뭐 별거라고,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며, 너처럼 예쁘고 영어도 잘하고 사람들과 친근하게 잘 어울리고 삶을 즐길 줄 아는 여자가 뭐 그런 것을 신경 쓰냐고, 친구 사귀는 것도 쉬울 거라고, 걱정마라고 했다.
그가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어느새 난 잠이 들었고, 그가 일어나는 기척에 깨었을 때는 6시였다. 나도 일어나서 이것저것 물건들을 정리했고, 그는 짐을 마저 꾸려 아래층에 내려놓고는 다시 올라왔다. 그는 나를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우린 아쉬움에 크게 포옹을 했고 만나서 정말 좋았다고, 연락하자고 했다. 못내 아쉬워하며 그는 다시 팔을 벌렸고, 우린 다시 한번 포옹한 후에 그는 떠났다.
난 다시 잠을 청했고, 나도 비행기를 타려면 9시에 출발해야 했으므로 8시쯤에 일어났다.
존이 준비해준 아침을 먹었다. 존의 호스텔 사업은 전에는 잘 돼서 일할 사람도 고용하고 했었는데, 요즘엔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호스텔을 좀 바꾸어보고, 6개월 정도 후에는 다른 일을 시작해볼 생각이라고, 이미 그 계획은 실행 중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은 니키타와 제임스, 그리고 일찍부터 자고 다음날 아침 떠난 한 남자가 전부였다. 다음 날 다른 팀이 또 들어오긴 했으나, 호스텔이 북적거리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난 그에게 카르테헤나에 다녀오는 동안 캐리어를 맡겨놓은 값으로 30페소를 주었다. 그는 몹시 고마워했다. 그는 원래는 줄 필요 없는 거라고 했고, 나는 알지만 그러고 싶다고 했다.
아! 나는 니키타에게 쿠바 공항에서 샀던 시가를 하나 주었다. 작은 팩을 뜯고 보니, 고급스럽게 낱개로 포장된 시가가 딱 세 개 들어있었다. 그것을 보고 니키타는 정말 자기한테 그중 하나를 줘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난 그중 하나를 그에게 주는 것이 참 좋았다.
보고타를 떠나면서 마치 집을 떠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