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얼굴을 가진 페루
드디어 페루 리마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택시비가 무려 60 솔(거의 2만 원)이었다. 먹는 것은 덜 먹더라도 난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호스텔은 옛 저택 같은 것을 조금 개조한 것처럼 드높은 천정과 큼직큼직한 회랑, 수많은 방들은 시원시원했고 샤워실도 넉넉했다. 무엇보다 화장실이나 샤워실을 이용할 때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대규모 호스텔이어서 편했다.
더구나 호스텔 로비 한쪽에는 여행사처럼 작은 오피스가 하나 있어서, 버스나 항공 등의 교통편, 각종 투어를 대신 예매해주고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와라즈(후아레즈) 행 오전 버스(50 솔: 17,000원)를 예약했다.
심 카드를 사러 리셉션 레이디가 가르쳐 준 대로 가봤더니, 아이폰의 유심은 그곳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물어물어 헤맨 끝에 한 곳을 찾았으나 여권이 있어야 한다고, 그럴까 봐 여권 사진을 찍어갔는데 원본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결국 사지 못했다. 대신 호스텔의 와이파이는 시원하게 잘 터졌다.
구도심처럼 작고 다닥다닥 붙은 게 아니라 그냥 보통의 대도시 느낌이었다. 차들이 거의 미친 듯이 질주했다. 보행자 초록 등도 거의 무시하고 신호가 바뀌어도 무시하고 그냥 달린다. 사람도, 차도 많고 시끄럽고 붐비고 정신없었다.
다음 날 아침 호스텔 조식을 먹으러 갔더니, 와우! 아침 식사가 성찬이다. 커피 맛도 좋고 주스에 과일(심지어 망고까지), 좋은 빵에 디저트 케이크, 거기에 오트밀 요거트까지 있었다. 난 그걸 다 먹고 케이크 하나를 더 갖다 먹었다. 조금 달콤한 카스텔라 같은 거였지만, 이곳 중남미에서는 케이크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먹어두었다.
와라즈에 갔다가 다시 리마로 돌아올 때도 이곳에 묵을까? 미라도르 쪽으로 숙소를 옮겨볼까 했는데, 이 조식과 이곳의 편안함이 나를 붙든다.
조식을 먹으며 옆에 앉은 청년이랑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르헨티나의 북부 도시, 살타에서 왔고 직업은 여행 가이드라고 했다. 함께 온 친구는 비행기 승무원이 되는 공부를 하는 중이라 지금은 영어를 잘 못하지만 배워야 한다고, 듣기는 잘하는데 말하기가 잘 안 된다고 했다.
수줍은 성격이라 그럴 것이다. 수줍은 사람은 말하기 능력을 익히기가 비교적 어렵다. 자기 점검도 심해서,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말이 안 나오고, 그러다 보니 말을 더 못 하게 되고, 그러니 연습이 안 되어 잘 늘지 않는다. 그들은 본국 언어로도 그런 식이어서, 평소에도 말수가 적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마련이다. 딱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의 다음 여행지는 멕시코라고 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값이 너무 비싸서 한국은 갈 엄두를 못 낸다고 했다.
아침에 와라즈(Huaraz)행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가는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더니, 리셉션 레이디가 그곳에 택시로 가는 한국 여행자가 있다며 함께 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과 그 일행 두나는 나와 택시에 동승했고, 난 어차피 혼자서도 택시를 탈 예정이었다며 내가 택시비를 내겠다고 했다. 그들은 함께 나누어서 내자고 했지만 난 그냥 내가 내겠다고 했다.
터미널에서 내가 고산병 약이 두 개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 청년이 알약 6개를 나눠주었다. 그들은 인터넷으로 표를 샀고 나는 호스텔에서 샀는데, 두나가 내 버스 값을 보고 ‘별 차이 안 나네’라고 했다. 그들은 이층으로 가고 나만 1층으로 왔는데 1층에는 승객이 나를 포함해서 딱 세 명이었다.
난 1인석에 앉았는데, 도중에 아무도 안 탄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다른 이 인석에 앉아 더 편하게 올 걸 그랬다. 버스가 어마 무시하게 좋았다. 의자가 엄청 넓고 푹신한 데다 뒤로 많이 젖혀지기도 했다. 버스 안은 에어컨 때문에 엄청 추웠다.
도중에 화장실을 가려고 출입문을 여는데 문이 안 열린다. 낑낑대고 있으니까 뒤에 앉아있던 커플 중 남자가 나와서, 두어 번 당겨 보고는 안 된다고 하며 돌아갔다. 아주 열심히 노력해본 건 아니고 그냥 남자가 자기 혼자니까 예의 상 하는 척해보는 것 같았다. 자기 여자 친구가 그랬다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을 텐데, 이렇게 성의 없이 척만 하고 가버리다니.
난 문을 두드려보기도 했지만 밖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왔다가 너무 급해서 안 되겠다 싶으니까 다시 나갔다. 기사는 도대체 왜 이문을 닫은 걸까? 그때까지도 거기가 특실인 줄 몰랐다.
도중에 식당에서 30분 간 점심을 먹으려고 내리는데, 이층에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내려서 깜짝 놀랐다. 2층의 승객들이 1층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문을 닫은 것이었다.
내가 결국 문을 열지 못하고 낑낑대자, 이번엔 커플 중 여자가 내 쪽으로 와서 함께 문을 열기 위해 애썼다. 이 문이 종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곧 닥칠 일이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공포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 되었다.
마침 2층에서 한 승객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그녀를 향해 입모양과 손짓으로 구조를 요청했다. 한 참 후에 기사가 나타나 문을 열었다. 손잡이를 돌리고 당기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문 여는 것을 보여주고 여자도, 나도 해보았지만 역시 우리는 열지 못했다.
다시 기사가 문을 닫았다가 여니 열렸다. 부서질 것을 상관 말고 온 힘으로 잡아당겨야 열리는 것이었다. 휴! 별일이 다 있다.
버스가 와라즈에 도착했을 때, 어둑해진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시 마주친 한국 청년은 나를 몹시 반갑고 친근하게 대해주었는데, 함께 있는 두나는 어쩐지 나와의 동행을 꺼리는 것 같았다. 다른 한국인과의 합류가 내키지 않았을까? 내가 또래가 아닌 게 싫었을까?
그들의 호스텔은 도보로 5분 거리여서 걸어갈 거라고 했다. 청년은 내 호스텔을 검색해보더니 걸어서 15분 거리라고 했다. 그럼 택시 타야겠네. 이래서 무조건 호스텔은 센트로에서 가까워야 한다.
터미널 입구에서 호객하는 택시들 중 하나를 골라 탔다. 내가 주소를 보여주었더니 엉뚱하게 나를 택시에 태워 여행사로 데려갔다. 숙소에서도 다 투어 부킹을 해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혹시나 해서, 그리고 택시로 15분 거리나 되는데 숙소에서 부킹을 할 수 없다면 밤에 다시 나올 수도 없고 해서 못 이긴 척 따라 들어갔다.
파론 호수와 69 호수 각 하루씩 이틀 일정인데 합쳐서 80 솔, 별도의 입장료는 각각 10 솔과 30 솔이라고 했다. 나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여자 직원이 와서 이런 내용들을 설명해주며, 내일 아침 숙소에서 픽업할 거라고 했다.
내가 가격이 적당한가 물었더니 그녀가 슬그머니 웃으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는 조금 비싸다는 의미이고 택시 기사가 커미션을 챙긴다는 의미다.
자꾸 내게 투어를 할 것인지 확인하는 택시 기사에게 투어비가 비싸다고 했더니 75 솔로 깎아주었다. 그는 호스텔을 찾지 못해 주변을 맴맴 돌다, 한참 후에야 겨우 찾아서 나를 호스텔 주인에게 안내해주고 갔다. 택시비도 안 받았다. 뭐 잘 됐네. 조금 비싸더라도 택시비라고 치자. 난 택시비가 10 솔 정도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시내에서 호스텔까지 겨우 4 솔(1,400원)이었다.
싱글 룸을 예약할 때 욕실과 화장실은 공용이라고 했었는데, 내가 3박을 예약해서인지 욕실과 화장실이 딸린 룸을 주었다. 방은 작았지만 엄청 깨끗했다. 검붉은 이불 색깔이 꽝이었지만. 3일에 66 솔(1일에 7,500원), 겨우 도미토리 배드 한 개 값이다. 가성비가 갑이라던 후기는 맞는 말이었다.
바로 앞에 식당이 있어서 치킨 수프를 시켰는데, 담겨 나온 모양도 맛도 환상적이었다. 치킨을 잘게 썰어서 엄청 부드러운 데다 먹기에 전혀 고기라는 느낌이 없었다. 태국에서 먹었던 똠냠꿍 비슷한 맛이었다. 짜지 않게 해달라고 했더니 간도 딱 맞았다. 행복하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가격도 착해서 10 솔.
그런데 너무 기분이 좋았던 나는 친절한 웨이터에게 2 솔짜리 2개를 팁으로 주어버렸다. 음식 값의 40%를 팁으로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