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얼굴을 가진 페루
아침 7시 40분에 버스가 픽업하러 온다 해서 7시쯤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동양인인 것 같아 한국인인가 물었더니 일본인이라고 했다. 우린 식사하면서 여행 이야기를 조금 주고받았다. 룸에 올라가 양치하고 가방을 챙겨서 내려오니 나머지 팀은 모두 가고 나만 남았다. 나만 이 숙소가 아닌 다른 여행사에 예약을 한 것이다.
8시 30분이 되도록 차가 오지 않아서, 주인이 내 티켓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두세 번 더 걸어 봐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주인은 이상하다며, 마치 거 보라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러게 여기 와서 나를 통해 예약했어야지 하는 듯한.
그의 마음속에서는 내 픽업 차량이 영영 나타나지 않아 내가 낭패에 빠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쳤을지도 모른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우리 안에는 참 예측 불가능한 형태의 온갖 마음들이 있다.
몇 번 더 시도해본 끝에 마침내 통화가 이루어졌다. 픽업 차량이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라 했다. 8시 40분쯤 되어서야 버스가 왔다. 주인은 내내 뜨악한 눈치다.
내가 탄 차량은 미니 밴이었는데, 뒤 쪽 문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운전석 옆에 타야 했다. 창문을 끝까지 다 내려놓고 있어서 바람에 머리가 날리고 몹시 추웠다. 이러다 감기 걸리는 것 아니야? 정차하면 자리를 바꾸겠다고 할까? 하지만 너무 늦었다.
차는 더 태울 사람이 없었는지 도심을 벗어나 외곽 도로로 접어들었다. 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기사에게 창문을 좀 닫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조금만 남기고 닫으란다. 진작 말할 걸. 뒤쪽은 모두 창문이 닫혀 있어서 앞에 열린 창문으로 전체 환기를 시키나 보다 싶어, 부처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자 했었지만 나도 살아야 했다.
세 시간쯤 달렸을까? 차에서 내려 30분 시간을 주며 점심을 먹으라고 했다. 커다란 레스토랑이었다. 난 어제저녁 늦은 시간에 배불리 수프 한 그릇을 다 먹은 데다 아침도 든든히 먹어서 따로 음식을 시켜먹을 생각은 없었다. 대신 어제 아침 보고타의 호스텔에서 조식으로 나온 두 개의 크롸상 중 한 개를 싸왔는데 그걸 꺼내 먹었다.
혼자 여행하며 난감한 것은 이렇게 애매하게 혼자서 끼니를 때워야 할 때다. 식당에서 정식으로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 것도 아니고, 싸온 빵 쪼가리를 쭈뼛거리며 꺼내 먹어야 할 때.
다시 버스를 타고 달리다 어느 호수 옆에 이르렀는데 그곳이 파론 호수라고 했다. 호수는 물빛이 예뻤지만 탁 트이지 않아서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검색한 정보에 의하면 45분 정도 걷는다고 했는데 여긴 버스 하차 지점이 바로 호수 앞이었다.
가이드가 스페인어로 뭐라고 했지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다가 지나가던 한 커플에에게 물었다. 원하면 그냥 여기서 호수를 감상할 수도 있고, 저기로 100미터쯤 올라가면 미라도르가 있는데 그곳에 가도 된다고, 자기네는 거기에 간다고 했다.
아무튼 여기서만 시간을 보낼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나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옳은 선택이라며 지지해 주었다. 오르는 길은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힘든 것 같기도 하고 별로 힘들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남자의 설명으로는 산소가 부족해서 조금은 힘들 거라고 했다.
올라가다 보니 남자만 보이고 여자는 안 보인다. 고산지대라 다리가 무거웠지만 바위들을 딛고 올라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한참 올라가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 거기 펼쳐진 호수 풍경이란!
그 물빛은 말 그대로 짙은 에메랄드 빛이었다. 검은 바위 계곡 사이에 고여 있는 호수의 빛깔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긴 계곡을 따라 이어진 호수, 그 위로 산허리를 감싸고 흐르는 구름. 시시각각 안개 같은 구름이 밀려왔다가 사라지면, 호수도 그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계곡을 감고 도는 흰 구름 띠를 보며 줄리엣 비노쉬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주연한 영화, ‘Clouds of Sils Maria’가 떠올랐다. 캐논 D장조의 장엄한 선율과 함께, 길고 하얀 구름띠가 느리게, 뱀처럼 계곡을 감고 돌던 장면이 무척 인상적인 영화였다.
배경이 스위스였던가,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현상인 줄 알았는데 여기도 비슷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캐나다 루이스 호수의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도 연상되었다. 그곳이 더 부드럽고 정적인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뭔가 더 쨍한 느낌이었다.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닌, 좀 더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내가 셀카를 찍고 있으니까 지나가던 좀 전의 그 남자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오! 잘됐다. 여행 중 일행 없는 슬픔 중 하나는 제대로 된 내 사진을 남기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내 사진을 찍어주고 나도 그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함께 왔던 그 여자는 중간에 포기했다고 한다. 포기할 만큼 힘든 코스는 아니었는데.
그가 먼저 내려가고 나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내려오다가 아침에 식당에서 본 그 일본 걸과 마주쳤다. 그녀는 커다란 SRL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우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난 입고 있던 검정 재킷을 벗어버리고 연두색 민소매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상대가 여자라는 게 이럴 때 좀 편하다.
한참 내려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난 아침에 차가 잠시 정차했을 때 사람들이 차 앞으로 달려와 파는 우비를 5 솔에 샀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비가 정말 필요했던 참이었으므로. 난 가방 속에서 우비를 꺼내 입었다. 그녀는 우비가 없다고 했다.
우린 산을 내려가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내일로 예정된 69 호수 트레킹에 대한 얘기를 했다. 69 호수는 여기보다 고도가 훨씬 높은 데다 가파른 산을 더 오래 올라가야 하는 고난도 트래킹 코스다. 그녀에게 고산병 약이 있는지 물었더니 없다고 해서 내 것을 나눠주겠다고 했다. 나도 두나 일행에게서 나눠 받은 것이라, 이렇게 다른 사람과 나누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남은 네 알 중에 두 알을 건네주며 오늘 밤 하나, 내일 아침 한 알을 먹으라고 했다. 그녀는 너무 중요한 건데 정말 고맙다고 했다. 그 마음 나도 안다. 나도 당장 필요하긴 한데 어디서 사야 할지도 모르는 참에, 누군가가 자기 것을 나누어 주었을 때의 그 고마움.
두나와 함께 있던 한국 청년이 흔쾌히 그렇게 했고, 또 옆에 있던 다른 한국 청년도 자기 것을 나눠주려고 했다고 말했었다. 정작 절실하게 뭔가가 필요할 때면 한국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스스럼없이 내게 나누어주곤 한다.
그녀는 페루 여행 후에 칠레로 갔다가 한국을 들러 귀국한다고 했다. 1년간의 여행을 마치게 되는 것이란다. 친구의 결혼식 파티가 곧 있어서인데, 그게 아니었으면 이대로 좀 더 여행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여행은 돈과 시간과 그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의 3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난 그중 있는 게 시간이고, 없는 게 돈이고, 의지는 간혹 있다가 없다가 한다.
나서기 전에는 내키지 않고 성가시다가도, 일단 나서면 누구 못지않게 여행을 즐기는 나다.
당분간은 여행을 하더라도 비교적 물가가 싼 나라들 위주로 다닐 생각이다. 동남아 국가 중에서 아직 안 가본 나라(미얀마,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등)나 구 소련 연방 국가들.(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아마도 내 피부는 더 거칠어지고 더 늙을 것이다. 그러나 내 정신은 더 또렷해지고 활발해지고 생기에 넘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여행 중독인지 모른다. 한국에도 이런 여행 중독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도 어려워지면 집을 줄여서 그 차액으로 여행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쉬운 우리 동네를 떠나야 하는데, 더 좋은 동네를 찾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호젓한 등산로도 있고 더 좋은 공원도 있고 더 큰 도서관도 있는 그런 곳. 벤치에서 마스크 쓰고, 아니면 예쁜 모자를 쓰고 앉아 글도 쓰면 좋겠지.
파론 호수 투어를 마치고 호스텔로 돌아와, 발만 후다닥 씻고 호스텔 앞의 그 레스토랑을 다시 찾았다. 어제의 그 웨이터는 안 보인다. 다른 걸 먹어볼까도 했지만 다시 한번 그 수프 맛을 보고 싶었다. 여자 직원은 내게 인살라다나 뭐 더 비싼 것을 먹어보도록 권했지만 난 그냥 수프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제보다 면이 더 불어 있었고 따끈함도 덜 한 것이 뭔가 부족했다. 같은 음식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싶게.
어제 그 웨이터가 나타나 손짓하며 인사한다. 어제 너무 많은 팁을 주어버려서, 오늘은 미안하지만 음식 값의 10프로인 1 솔의 팁만 남겼다. 음식 맛도 덜했으므로.
어제 그는 직접 내 주문을 받았고 내가 짜지 않게라며 번역기를 돌려 보여준 것을 주방에 전달해주었고, 내게 그 깜짝 놀랄만한 비주얼과 맛의 수프를 내주었다. 도중에 내게 와서 영어로 짧은 말도 걸었었다. 어제 준 4 솔의 팁이 아깝지 않았었다.
다만 오늘은 달랐다. 나의 만족도에 따른 티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