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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69 호수는

- 와라즈, 페루

by Annie


새벽 5시 45분에 버스가 숙소를 출발했다. 중간에 어느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데 버스 옆자리에 뚱하게 앉아있던 남자가 혼자서, 그리고 그 옆 테이블에는 또 다른 남자가 혼자서 앉아있었다. 먼저 말을 걸고 합석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중에 두 명의 걸이 그 둘을 모두 합석시켜 신나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후회되었다. 그 두 남자에게는 내가 말을 걸고 합석하지 않았던 것이 행운이 되었을 테지만.


그중 한 남자가 볼리비아에서 했던 아마존 팜파스 투어 이야기하는 것을 얼핏 들었는데, 그것에 관해 물어볼 기회도 놓친 셈이다.

‘절대 소극적이지 않을 것, 사람들에게 말 거는 것을 두려워 말 것’을 되뇌어본다.


오늘 가는 69 호수는 고도가 높아서 고산병에 시달릴 수 있는 힘든 코스라고 한다. 미리 고산병 약을 먹어두었다. 투어버스를 타고 가면서 도중에 식당에서 조식을 먹었는데, 그곳을 나오다 다시 두나 커플과 마주쳤다. 나는 나오고 그들은 먹으러 들어가는 길이니, 일정이 30분 정도 차이가 난다.


호수로 등반하는 길 초입에서부터 발걸음이 무거운 데다, 벌써 3일째 화장실을 가지 못해 속이 묵지근한 게 느낌이 묘하다. 분명 화장실 문제로 오늘 속 썩을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앞서 마지막 화장실을 들렀는데 쪼그려 앉아야 하는 이상한 곳이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볼 일을 해결하고 가리라 마음먹고 한 10분은 그렇게 쪼그려 앉아있었을 것이다. 머리가 터질 듯이 힘을 써 봐도 나오지는 않고 누군가 다급하게 노크를 한다. 결국 그대로 나와야 했다.


좋지 않은 징조다. 우리 팀들은 벌써 보이지 않고, 가이드만 애가 타서 나더러 서두르라고 한다. 난 쪼그려 앉아있던 다리가 거의 저려왔고 발걸음도 더욱 무거웠다. 일행을 따라잡기도 힘들었다. 가이드더러 먼저 가라고, 천천히 가겠다며 그를 앞서 보냈다.

그냥 평지처럼 보이는데 왜 이렇게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울까? 오늘 정상 등반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으니, 그냥 천천히 주변의 풍경을 즐기리라 마음을 먹는다.


푸르디 푸른 하늘과 저 너머 하얀 설산, 그 앞의 검푸른 바위산이 서로 층을 이루어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커진다. 나는 멀리 높은 산을 배경으로 한 풀밭에 우비를 깔고 앉았다. 내 앞에서 두 마리의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가 그중 한 마리가 점점 더 가까이 오더니, 급기야 내 발치에 있던 물병을 핥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이 머리를 들이밀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평상시에 사람들에게 많이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한 외국 여성이 그렇게 앉아있는 내 모습이 참 보기 좋다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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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에서 또 두나 커플이 나타났다. 나는 천천히 가겠다며 그들을 먼저 보냈다. 그렇게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거의 평지처럼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마치 발목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달아 놓은 것 같았다.


약간의 오르막길에서는 삼십 미터쯤 걷다 쉬다를 반복했다. 힘들면 바위에 걸터앉아 쉬며, 긴 폭포가 떨어지는 앞산과 하늘의 멋진 풍경을 보다가, 때로는 졸기도 했다. 그렇게 걷다가, 쉬다가, 졸다가 하면서 어느 틈엔가 나도 상당히 올라와 있었다. 중간에 한 젊은 여성이 지친 표정으로 쉬고 있었는데, 그녀는 더 이상은 못 가겠다며 포기했다고 했다.


난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더 올라갔다. 이러다 정상까지 가는 것 아니야? 조금 더 올라가니, 넓은 바위에 앉아 있는 아이 두 명과 할머니가 보였다. 아이 중 한 명은 열네댓 살 되어 보이는데 영어를 좀 할 줄 알았다. 정상을 향해 올라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난 그들을 뒤로하고 더 올라갔다. 길의 경사가 커지는 곳 앞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난 가방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 조금 더 걸었다.


5분이나 지났을까? 저 산 꼭대기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비 때문인 것 같았다. 제일 앞에 내려오는 사람에게 여기서 정상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더니 한 시간 정도 걸릴 거라 했다. 그 구간이 제일 힘든 코스라고 했다. 내려오는 것은 금방인데, 올라가기는 힘들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걷던 나도 방향을 돌렸다. 비만 아니었으면 나도 거북이처럼 느리게라도 결국 정상까지 갔을지도 모르겠다. 내려오다가 올라올 때 보았던 할머니와 손녀들이 노랗고 빨간 우비를 입고 있는 모습이 초록의 산을 배경으로 예뻐서 사진으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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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버스는 사람들이 많이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출발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하는데, 옆 버스에 빈자리가 넷 있다고 해서 나는 그곳으로 옮겨 탔다. 아침의 그 팜파스 가이가 이미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저희 넷이서 짝짜꿍이 되어있었다. 졸지에 갈 곳을 잃고 다른 자리에 앉아, 나 혼자 그들을 미워하고 있던 참이었다.

혼자만의 이런 좀스러운 생각은 한편으로는 우스운 것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나 같은 A형 타입의 사람들에게는 있을 법한 '의식의 흐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Parasite)으로 오스카상 4개 부문을 수상하고 난 후, 이런 얘기를 했다. ‘가장 개인 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그것은 공감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느 상황에서 내가 한 번쯤, 혹은 절실하게 느꼈거나 해보았던 생각들이 영화나 소설에서 오버랩될 때, 우린 그 소설이나 영화가 절묘하다고 느낀다. 공감의 지점에서 감탄하고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의식의 흐름' 또한 누군가에게는 공감의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소심하게 기대해본다.


한 멕시코인이 옆 자리에 앉았다. 멕시코에서 처음 카우치 서핑 연락이 왔던 파블로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말투, 키가 작고 이목구비는 잘생겼다고 할 수 없지만, 지적이며 말투가 여성스러운 그는 나이스했다.

페루의 음식과 관광지에 대한 정보들을 많이 알려주었고 고국, 멕시코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그는 성심성의껏 대화를 이어가고자 했지만 난 아주 적극적이진 않았다. 이후 난 피곤하고 졸려서 두 시간 정도 죽은 듯이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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