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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 와라즈에서 리마, 페루

by Annie


와라즈의 아름다운 산과 푸른 하늘, 멀리 보이는 설산, 금세 비가 내리며 창가에 맺히는 빗방울, 비 내리는 풍경. 굽이굽이 돌아가는 절벽으로 이어진 길은 때로는 180도의, 심지어 한 번은 360도의 파노라마 풍경을 보여주었다. 휴대폰 카메라는 소리가 커서, 그때까지 가방에서 잠자고 있던 카메라를 꺼냈다.


호수 등반 중에 찍었던 사진을 보니, 아! 그 퀄리티와 색감은 기가 막히게 훌륭했다. 69 호수 갈 때 갖고 갔으면서도 귀찮아서, 혹은 자꾸 까매지곤 하는 스크린에 짜증이 나서, 쓰지 않고 도로 가방에 넣어버렸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덜컹거리는 차창을 통해서나마 흔들리는 풍경을 찍었다. 그러나 손에 익지 않은 카메라의 노출은 엉망이었다.


와라즈를 벗어나니 사막 모래와 잿빛 돌가루가 섞인 것 같은, 나무 한 그루 없이 척박한 산들이 나타났다. 어떤 산들은 밝은 황토색의 큰 바위들로 뒤덮여 있었다. 굽이굽이 굽어진 길이라 버스는 매우 천천히 달렸다. 그 척박한 산들을 지나고 나니 이번엔 양쪽으로 푸른 들판이 펼쳐진다. 키높이를 훌쩍 넘기는 크고 긴 줄기를 가진 식물이 들판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곡식인지 그냥 풀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처음 이 버스에 탔을 때는 꽤 실망했었다. 40 솔의 이층석이라 그런지 아니면 특실인 1층도 그런지, 올 때 탔던 버스보다 한 등급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래 칸 1등석은 65페소로 올 때의 50페소보다 더 비쌌다. 2인석 자리는 몹시 비좁았다. 왠지 내 대신 버스를 예약해준 호스텔 주인에게 속은 것 같은 기분이어서 화가 났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해서도 옆에 아무도 타지 않았고, 일행이 없는 승객들은 모두 2인석을 하나씩 차지하고 가는 것이다. 가운데 팔걸이를 들어 올리니, 이건 올 때의 그 대단했던 특실 1인석보다 더 넓고 편안하다. 게다가 제일 앞에서 두 번째 좌석이라, 창을 통해 3면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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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때는 버스 창문이 모두 짙게 코팅되어있어서 바깥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난 이 구간의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지도 모르고 그저 잠만 자며 지루해했었다. 게다가 티브이에서는 내내 시끄럽게 치고 때리는 영화만 연달아 틀어놓는 바람에 소음공해에 시달렸어야 했다.

그런데 이 버스에서는 개를 사랑하는 한 소녀의 성장기를 다룬 훈훈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를 틀어주어, 중간중간 풍경 감상과 영화 감상을 번갈아 할 수 있었다. 갑자기 호스텔 주인이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버스가 이제 평지로 들어서서 왕복 양쪽 차선이 시원하게 보인다. 우리나라 고속도로 같은 차단벽이 아니라, 가운데가 조금 넓은 빈 공간이 왕복 차선을 나누고 있어서 도로 풍경도 덜 지루해 보였다. 사고가 나면 더 위험하긴 하겠지만.


이번에는 거의 사막 같은 곳이 나왔다. 흔히 보는 빛깔보다 더 거뭇하게 보이는 사막, 그리고 그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정말 변화무쌍한 풍경이다. 그리고는 양쪽으로 작은 타운이 나타난다. 다시 바다 쪽으로 타운, 다른 한쪽엔 들판, 다시 타운... 날씨는 내내 흐리다.


난 양쪽 페이지를 오가며 서로 다른 날의 일기를 쓰고 있다. 글도, 풍경도 다이내믹하다. 스페인어로 된 영화 자막을 보다 보니 간혹 아는, 혹은 그럴 거라 짐작되는 단어와 어구들이 나온다.

아래층에서는 화장실 문 여닫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이래서 장거리 버스 타기 전에는 뭘 마신다거나 먹는 것은 삼가야 한다. 차 안의 화장실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곳이다.


어떻게 된 것이 모래 언덕 위에 집들이 있다. 비행기가 처음 리마 상공에 접어들었을 때의 풍경을 떠올려 보면, 아름다운 페루는 아니었다. 온통 회갈색의 민둥산과 길, 심지어 건물들도 모두 한결같은 회갈색이어서 몹시 우울해 보이는, 단조롭고 지루한 풍경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마추픽추의 나라, 페루와는 영 다른 첫인상이었다.


다녀보니, 그것은 많은 부분 페루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리마의 구시가지는 그런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도로에 가득한 차들이 난폭하게 질주하며 요란한 경적소리를 내는데, 그것이 이 도시의 단조로움을 덜해준다고 해야 할까, 더해준다고 해야 할까 의문이었다.


그러나 와라즈의 아름다운 자연과, 리마까지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풍경이 페루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이제 4시간 정도 달렸으니 한 번 정도 휴게소에서 쉬겠지. 화장실은 그때 가야지.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말쑥한 정장 차림의 버스 승무원이 점심을 써빙하기 시작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의 흔들리는 차 안에서 쟁반을 들고. 그러더니 이번엔 음료를 써빙한다. 티백과 따뜻한 물, 콜라 중에서 난 양이 적고 이뇨 작용이 덜할 것 같은 콜라를 골랐다. 거의 묘기에 가까운 써빙이다. 페루의 버스, 놀랍다.


여기 주택들은 성냥갑처럼 규격이 일정하고 네모난 작은 벽돌집이다. 몇 층높이의 건물들도 비슷한 모습이다. 사막 같은 등성이에 세워진 이 도시는 집마다 물 공급을 어떻게 하는 걸까? 갑자기 앞에 나타난 해변. 이 사막에 해변이라니 놀랍다. 혹시 여기가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는 사막과 바다가 평행한 그곳은 아닐까?


슬슬 화장실 냄새가 올라온다. 햇빛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하려고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모래산도 보이고, 한쪽 모래 언덕 위로 난 길에 차들이 달려간다. 오묘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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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35분, 흐린 날이어서 그런지 조금씩 어두워진다. 곧 노을이 지기 시작할 텐데, 흐린 날씨에도 내 뒤쪽으로 지는 옅은 햇살이 비쳐 든다.

네 시간째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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