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라즈에서 돌아와 버스에서 내린 바로 그곳, 북부 터미널에서 이카행 버스표를 끊었다. 이카에 가면 와카치노 사막과 그곳의 오아시스 마을을 볼 수 있고, 버기카를 타고 사막을 누빌 수 있다. 또 이카는 멀지 않은 곳에 '나스카 라인'이 있어서, 경비행기를 타고 돌아볼 수 있는 경유지이기도 하다.
오전 10:30분에 출발해서 5시간 후인 오후 3시 반에 이카에 도착할 것이다. 문제는 이카에서 와카치나까지 2시간 걸린다고 하니, 거기서 내려서도 버스를 기다렸다 갈아타고 하면 3시간. 그럼 6시가 넘어버려 당일에는 버기카 투어를 못 하겠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스텔 리셉션에서 마주친 한국 걸이 그러는데, 이카에서 와카치나까지 2시간이 아니라, 택시로 30분이란다. 그럼 와카치나에 4시쯤 도착할 테니, 버기카 투어를 할 시간이 충분한 셈이다.
다만 이카행 버스터미널이 호스텔에서 너무 멀다. 그래서 호스텔 리셉션에 가서 이카로 갈 수 있는 더 가까운 터미널이 있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그곳에서는 차가 12:15에 출발한다고 했다. 그러면 너무 늦다고 했더니, 내가 표를 끊은 10:30분 버스가 바로 그 버스라고 했다. 그 터미널까지 오는 시간에 차가 막혀서 그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당일에 와카치나에서 버기가 투어와 샌드 보딩을 할 수 있고, 다음 날 나스카 경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날 야간 버스로 쿠스코까지 이동할 수 있다. 머릿속에 레고처럼 착착 맞아 들어가는 일정이 그려졌다. 그래서 다음날 이카에서 출발할 쿠스코행 야간 버스를 호스텔에서 예약해버렸다. 그러나 조금 더 편해보려고 했던 그 시도가 화근이 될 줄이야.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맞은편 공원을 바라보며, 음악과 함께 나른하게 멍 때리던 순간도 좋았다. 11시까지 터미널에 가야 한다고 해서 시간 맞춰 택시를 타고 제대로 도착도 했다. 그런데 북부 터미널에서 여기까지 1시간 반이면, 여기서 이카까지 3시간 반이어야 얘기가 맞는데, 여기도 5시간 걸린단다.
그러면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도착하게 되는 건데, 그럼 버기카 투어는 물 건너가는 것이다. 다음날엔 나스카 라인을 보고 나서, 쿠스코행 야간 버스를 타도록 예매까지 해둔 상황에서 말이다.
이곳 터미널에서도 호스텔 리셉션에서처럼 같은 버스라고 말들을 맞추고 있지만, 그들은 분명 나를 속이고 있다. 버기카 투어만 아니면 두어 시간쯤 늦게 가는 건 문제도 아니다. 그런데 그 투어 때문에 이카에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걸 못하게 생겼다.
현지인들끼리 입을 맞추어버리면 관광객은 뻔히 알면서도 당하는 수밖에 없다. 몇 번 사실 여부를 따져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니면 그들이 나를 속인 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5시간이란 애초에 북부 터미널 기준이 아니고 이곳 터미널 기준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버기카 투어를 놓쳤을 때,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사막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 타운이라 했으니 그걸 즐기면 될 것이다. 밤에 사막에 올라 야경을 내려다보든가, 아니면 아침에 일출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일출 사막 등반을 할 경우에 나스카 경비행기 탑승과 이후, 14시간 동안의 야간 버스 이동이라는 벅찬 일정이 문제다. 버스표를 물릴 수는 없겠지? 안타깝다. 기껏 사막까지 가서 사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다니.
'그럼 야경으로 만족하고 나스카 경비행기 투어에 집중하자. 그냥 오아시스가 덤이었다 여기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5시간이나 버스를 타면서 글도 못쓰고 풍경도 안 보고, 괜히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인터넷이라는 게 편리하면서도 불필요하게 시간을 허비하게도 한다. 문득 어제 와라즈에서의 택시 기사 생각이 난다. 4 솔인 것을 뻔히 아는 내게 6 솔을 불렀다가 내가 눈을 흘기며 웃으니까, 그는 5 솔만 달라고 했다. 그 정도면 애교다. 돈으로 따지자면 300원 차이일 뿐이니까.
오후 6시가 거의 다 되어서 이카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에게 사막 버기카 투어에 대해 물어보니, 지금도 가능하다며 자기가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급 흥분했다. 게다가 택시기사가 내려준 나의 호스텔은 버기카 투어를 할 수 있는 사막 언덕 바로 앞이었다. 나는 기사에게 호스텔에 짐을 두고 옷만 갈아입고 오겠다며 기다리라고 하고는, 서둘러 호스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급히 체크인하고 짐은 보관소에 두고, 그 안에서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호스텔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나를 태우고 온 택시는 저만치 떠나가고 있었다. 난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뛰어갔지만, 그는 나를 못 보고 떠나버렸다. 어떻게 하지? 근처에 보이는 매표소 같은 곳에 가서 물어보니, 그들은 한 청년을 향해 손짓한다.
아직 날이 훤했고 버기카 투어가 가능하다고 해서 값을 치르고 그를 따라갔다. 사막 언덕을 조금 오르니, 그곳에 버키 카들이 있고 한 차 안에 남녀 커플이 타고 있었다. 난 청년이 이르는 대로 그 커플이 탄 차에 올랐다. 헐렁한 안전벨트를 매고 나니 차가 출발했다.
차는 모래 언덕을 속도감 있게 올라갔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광대하게 펼쳐진 사막이 나타났다. 막 노을이 시작되고 있는 하늘은 형용할 수 없이 다채로운 빛깔을 하고 있다.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불타는 것 같은 하늘은 사막과 곧 닿을 듯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낮은 산처럼 굴곡을 이룬 모래 언덕과 거기에 맞닿은 하늘을 가르며 속도를 높였다. 차가 가파른 내리막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때마다, 바이킹을 타는 것처럼 심장이 쫄깃해져서 눈을 질끈 감곤 했다. 차와 함께 그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만 같아 가슴이 덜컹하곤 했다.
그렇게 사막의 언덕을 오르내리며 질주하다, 기사가 어느 언덕에 차를 세우더니 우리에게 사진 찍을 시간을 주었다. 나는 휴대폰을 호스텔 짐 보관소에 두고 몸만 왔던 참이라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 함께 탄 커플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남자가 내 사진도 찍어주겠다고 하자, 나는 아쉬워하며 휴대폰을 두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보았던 그의 휴대폰이 아이폰이었다. 그렇다면 있다가 내려가는 길에 호스텔에 들러, 아이 드롭으로 사진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얘기를 하며 나는 그 폰으로 나를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예상치 못했던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할 뻔했는데 너무 다행이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는 기사가 커다란 샌드보드를 가져왔다. 그는 보드를 내려놓고 우리에게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 설명만 듣고서는, 수십 미터 저 아래로 보드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동행한 커플이 먼저 시도했는데, 그들이 차례로 잘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난 너무 무섭고 떨렸다.
여기서 내려가다 자칫 뒤집히거나 보드에서 떨어지면, 얼굴이 모래에 쓸려서 심한 상처를 입지 않을까도 걱정되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언덕 꼭대기로 내몰렸다. 머리를 앞쪽으로 하고 엎드린 채 출발했다. 순식간에 보드가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지만, 난 여전히 무섭고 온 몸이 뻣뻣하게 긴장되어 즐거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샌드 보딩은 생각했던 것보다 안전했고, 무사히 착지하고 나서는 그제야 조금 신기하고 재미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 번째 탈 때는, 언덕을 직선으로 내려간 후, 바로 기역자로 꺾어지는 언덕으로 이어서 내려가는 코스였다. 처음 직선 코스를 그런대로 잘 내려간 나는, 꺾어지는 그 지점에서 심장이 덜컹하며 어느 순간 비명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생 병이 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왜 이런 고문 같은 공포를 즐기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내가 그것을 해냈다는 것이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다. 노을 지는 사막에서의 버기카 투어는 꼭 다시 한번 해보고 싶지만, 샌드 보딩은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버기카 투어는 늦게 도착한 탓에 못할 것이라고 포기하고 있다가, 뜻하지 않게 순식간에 성사되는 바람에, 더욱 놀랍고 흥분된 경험이었다. 더 이른 시간에 여유 있게 갔더라면, 해가 중천에 떠서, 오히려 밋밋한 회갈색의 사막만 보고 왔을 수도 있었다. 마침 노을 시간에 맞추어 가서 황홀하게 타오르는 사막을 만날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경이롭고, 가슴이 뛰었던 것일 수 있다. 그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와카치나 사막은 꼭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