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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행기를 타고 나스카 라인
상공으로

- 나스카, 페루

by Annie



아침 일찍 와카치노 사막의 오아시스 타운을 돌아보았다. 상상 속에 존재하던 신비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그냥 평범한 호수 같았다. 다만 사막 아래쪽에 있는 호수이다 보니 오아시스가 맞기는 하다.

호수를 에워싼 식당과 바들이 지난밤의 불빛을 거두어들인 민낯의 풍경이다. 자연광 아래서 보는 오아시스의 모습은 마치 번쩍이던 도심 유흥가의 아침처럼 휑하고 단조로운 회색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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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여행사에서 나스카 경비행기 투어를 예약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직원들은 모두 한국 말을 조금씩 할 줄 알았다. 경비행기 탑승 티켓 100달러에는 이카에서 나스카 공항까지의 이동료가 포함되어 있고, 세금 30 솔은 별도였다.


정우는 나스카 경비행기 투어가 지루할 거라며, 권하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그러나 리마에서 와카치나까지 6시간을 이동한 후, 사막만 보고 그냥 쿠스코로 가기에는 비용이나 시간 면에서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스카 라인은 조금 비싸더라도 마추픽추와 함께 꼭 봐야 할 곳인 것 같았다. 도대체 사막에 뭔 그림을 어떻게, 얼마나 크게 그렸다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이카에서 나스카까지는 3시간 가까이 버스를 탔는데, 그때 본 페루의 풍경은 척박했다. 사람들이 살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곳처럼 보이는데 그런 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와카치나 사막도 노을이 그린 형형색색의 빛깔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을 뿐, 아침에 일어나 올려다보니 그냥 페루 특유의 색, 회갈색 모래 등성이였다. 물론 눈앞의 그곳을 넘어선 진짜 사막의 등성이는 더 아름답고 근사했을 수도 있다.

모래언덕 아래의 밋밋한 풍경을 보면서, 그곳 사람들은 사방이 모래 뿐인 그 작은 곳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지루할까 싶었다.


나스카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고 있으니, 길고 단조로운 사막이 펼쳐지다가, 평지에서 난데없이 솟은 바위산 무리가 보이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영암 월출산이 연상되기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 산은 황폐해 보이고 월출산은 장엄해 보인다는 것이다.


나스카 근처에 이르렀을 땐 길이 거의 바위산을 뚫고 나있었다. 어떤 곳은 오아시스처럼 움푹 들어간 곳에 초록의 나무 들판이 보이기도 했다. 사진으로 찍으면 단조로운 풍경일 테지만, 실제 풍경을 보면 ‘와아!’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이국적인 풍경, 그 낯설음과 새로움에.


나스카 경비행기 투어는 기대 이상이었다. 사실 처음 공중에서 보기에는 무슨 그림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스카 라인과 관계없이, 자연이 그려 낸 수묵화 같은 거대한 곡선들은 그 자체로 웅장한 대지예술 같았다.

한참 후에야 눈을 똑바로 뜨고 집중해서 보니, 실제 사람들이 그린 나스카 라인의 그림들이 또렷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넓은 곳을 멀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라 생각만큼 제대로 보기는 어려웠다.


나스카 라인은 1,000제곱미터의 평원에 200여 개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거미, 개, 도마뱀, 고양이, 새 등의 다양한 형상을 하고 있는 이 그림들은, 날개 하나의 너비가 100미터도 넘는 새를 포함해 그 크기가 보통 100~300미터에 이르고, 50~90미터에 이르는 더 작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경비행기가 4인승이 아닌 6인승이라 더 낮게 날지 않아서인지, 그 그림들은 마치 만화처럼 작아 보였다. 그럼에도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정확한 선들이 또렷하게 보이는 게 신기했다.

난 휴대폰과 카메라로 번갈아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그러느라 오히려 그 많은 나스카 라인들 중에 몇 개밖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로 인한 경이감 또한 반감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카메라는 실제 상황을 마음껏 즐기고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메이플소프도 이런 말을 했다.

"난 파티에는 카메라를 갖고 가지 않아."

내 게으름의 변명이 되어줄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그렇다. 덕분에 이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내내, 자료 사진이 부족해서 애를 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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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몰입을 방해받았던 것 중 하나는 이 경비행기 투어가 심한 멀미를 일으킨다는 정보였다. 그것을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자꾸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애초에 그런 정보가 없었다면, 좀 더 내가 보는 풍경과 비행 자체에 몰입하며 즐길 수 있었을 것 같다. 때로는 정보가 여행의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100달러 가치는 갖는 비행이었다.

앞으로 비행기를 탈 때면 꼭 창가 좌석을 예약해서, 이것도 하나의 새로운 투어라는 생각으로 바깥 풍경을 감상해야겠다.


오후 3시 반쯤, 택시 기사가 델 수르 버스 터미널에 나를 안내해주었다. 그곳에서 짐을 부치고, 두 블록만 가면 카페와 레스토랑 거리가 있다고 해서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이렇게 시간이 남을 때 새치 염색이나 해야지 하고 미용실을 찾아보니 하나가 금방 보인다.


미용실 안에는 미용사를 포함해, 말투도 외모도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구분이 안 가는 이들이 보였다. 직업상 주로 여자들을 대하다 보니 그렇게 된 남자일까, 그냥 여자일까? 그 미용사는 내 머리 끝만 조금 자르고 어시스턴트 같은 남자 미용사에게 뭐라 말하더니 가버렸다.


남은 미용사가 조금 서툴게 염색을 했다. 그는 내 머리를 감기고 나서 수건으로 닦지도 않고 바로 헤어드라이어를 들이댔다. 그러더니 큰 롤빗으로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드라이어를 내 머리카락에 딱 붙이고 말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극 손상된 모발을 이 사람이 아주 태우려고 작정을 했네.

난 손사래를 치며 하지 말라고 했다. 롤빗은 뺐으나 여전히 뜨거운 바람으로 조금 말리는 시늉을 하더니, 그냥 머리가 젖어있는 채로 미용 가운을 벗겨낸다. 50 솔이란다. 좀 바가지 쓴 느낌이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머리 무거운 숙제를 한 기분이라 상쾌하다. 아직도 두 번은 더 염색을 해야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다.


저녁을 안 먹으려던 참인데 버스를 타기까지는 아직도 3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어디 카페라도 가야겠다고 둘러보아지만 카페는 없고 모두 레스토랑 뿐이다. 그래서 시간도 보낼 겸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치킨 수프를 시켰다.


그런데 와라즈에서 먹었던 치킨 수프와는 영 딴판이다. 국물이 멀건 게, 짜지 않게 해달라고 했더니 아예 소금을 넣지 않았다. 소금을 달라고 해서 조금 넣어도 여전히 간은 심심하고, 다른 국물에서 그냥 닭고기만 건져 맹물에 끓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신 브로콜리와 당근이 좀 들어가 있었다. 그래, 좀 있다 차에서 또 저녁 먹을 거니까 가볍게 먹어야지. 국물은 수분 섭취를 위해 많이 마셔두자.


식사가 끝나면 바로 자리 비워줘야 하나 했는데, 앞자리의 걸들이 죽치고 앉아 보드 게임을 하고 있으니, 그럼 나도 눌러앉아 글을 써볼까? 식사를 하다 보니 하늘이 노을빛이었다.

좋네. 낯선 나라에서 노을을 보며 이른 저녁을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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