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가지 얼굴의 페루
중년의 남자 넷과 한 모녀, 친구인 듯한 여성 2명. 그리고 해미.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로 마추픽추에 오르는 버스를 탔다. 해미는 페루의 머리띠로 앞머리를 말끔히 감싸 올리고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렸는데, 상큼하니 예뻤다. 그녀는 늘 새로운 사람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함께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반면 나는 어느새 해미를 내 여행 짝으로 여기는 안일함에 빠져,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스프링처럼 원래의 폐쇄적인 나로 잘 돌아간다. 특히 한국인들과 함께 있을 때면 더욱 그렇다.
버스에 타서 그녀가 운전기사 옆 싱글 좌석에 가서 앉자, 나도 보란 듯이 혼자 앉은 청년 옆 좌석에 앉아 바로 말을 걸었다.
그가 영어를 거의 못해서 겨우 몇 단어의 영어로 어설픈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버스는 가파른 경사의 산길을 달려 마추픽추 입구에 이르렀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그는 “Bye, Annie” 하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해미의 적극적인 태도를 배워, 나도 우리 팀의 다른 멤버들에게 말을 더 붙여보기도 했다. 네 명의 중년 남자 그룹 중 한 명이 포토그래퍼를 자처하며, 연속 촬영으로 내 사진을 찍어주어서 기념할만한 사진들을 꽤 남겼다.
세계 7대 불가사의, 꿈의 여행지, 마추픽추(Machupicchu)는 이제 그 불가사의함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운 관광지가 되어버린 것 같다. 적이 발견할 수 없도록 해발 2280미터의 깊고 높은 산 위에 건설한 비밀 도시, 내겐 그것이 원래 그 신비함의 포인트였다.
그러나 산 아래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올라가니 바로 입구가 나왔고, 얼마 걷지 않아 눈앞에 펼쳐지는 마추픽추는 내 상상 속의 그 신비함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그냥 버스 타면 쉽게 올 수 있는 유적지 정도로 느껴졌던 것이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잉카인들이 다녔던 길을 따라, 걸어서 마추픽추에 도착하는 '잉카 트레킹' 투어도 있다고 했다. 며칠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인 후에야 마주하게 되는 마추픽추, 그렇게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벅찬 눈물을 쏟게 한다는 '잉카 트레킹'.
사실 마추픽추에 가는 과정은 그렇게 겪어야 그곳의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순간 이동하듯이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전망대에 올랐을 때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서, 바로 눈앞에 있는 마추픽추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개는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안개가 짙은 날에 오전 투어를 나선 이들은 결국 마추픽추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기도 한다니, 참으로 억울할 일이다.
이후 짜인 투어 일정으로, 돌아갈 잉카 레일 티켓이며 숙박지, 잉카 레일에서 내려 쿠스코로 돌아가는 벤 예약 등이 모두 틀어지거나, 그것이 너무 복잡해서 아예 다시 보러 오는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설마 우리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조금 초조해져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조바심 가운데 기다린 지 한참 후에야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카메라 버튼 누르는 소리가 마치 티브이에서 보던, 포토라인의 사진 기자들이 한꺼번에 터뜨리는 소리 같았다. 안개가 조금씩 더 걷히거나, 뒤이어 온 안개가 사라질 때마다, 매번 그 광경이 되풀이되었다. 나도 그 무리에 합류해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두들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 신비스러운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더라면 어땠을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안갯속에서 차츰 드러나는 마추픽추를 마주하며, 깊은 경외감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곳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들 취재 경쟁에 나섰다가, 취재 대상이 사라지자 흩어지는 기자들 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후, 마추픽추를 배경으로 한 본격적인 개인 인물 촬영에 돌입하게 된 것이었다.
마추픽추는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다가 직접 그 아래로 내려가 돌아보니, 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하긴 인구 2천 명이 살 수 있는 도시였다고 하니. 스페인이 침략해 들어오면서 그들은 이곳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 그룹 중의 두 여자는 맞은편에서 마추픽추를 내려다보고 있는 와이나 픽추(Huaynapicchu) 봉우리 등반에 나섰다. 그곳은 하루 입장객이 제한되어 있어서 예약을 해야만 갈 수 있고, 따로 100달러 이상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던 참이라, 예약 이야기도 거기 가서야 처음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미리 예약해서 가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힘든 등반 코스를 검색해보며, 그때 안 간 것이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다.
해미가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내려간다고 해서 나도 그러겠다고 했지만, 도중에 그녀가 가이드와 계속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고 나는 그냥 나대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금 지치기도 하고, 혼자 걸어 내려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난 그냥 버스를 탔다.
호텔에 들러 짐을 챙기고 나서, 잉카 레일을 타러 기차역으로 가다 해미를 만났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어서, 우린 카페 이층의 작은 발코니 좌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남미 여행을 하면서 여행 가이드에게도 관심이 간다고 했다. 남미 여행 중에 현지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현재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는 한 한국 여성의 얘기를 하면서.
사실 그녀는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와 함께 걸어서 내려왔는데, 그가 그녀에게 점심을 사주었다고 했다. 그녀는 며칠 후에 다시 이곳에 와서 그와 만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얘기를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설렘의 홍조가 떠올랐다. 난 그런 그녀를 놀리듯 웃으며, 좋은 인연을 만들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잉카 레일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내 옆자리에는 70-80대 퇴직 교수들의 테마 여행을 이끌고 온 인솔자가 앉았다. 17박 18일인데 일정이 보통 빠듯한 게 아니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이동은 비행기로만 한다지만 비행기 이동 후 리마 반나절, 또 비행기 이동. 이틀 후 비행기를 타기 위해 또 리마 반나절. 이런 식이었다. 이런 무리한 여행 일정은 패키지여행의 단점이기도 하다.
무릇 여행은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패키지가 아닌 자유 여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