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계 투어와 잉카 레일
1박 2일 일정으로 마추픽추에 간다. 오늘은 그 초입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까지 이동하며, 도중에 ‘성스러운 계곡’ 투어를 한다. 모라이(Moray)에서 살리네라스(Salineras)에 가는 길이 너무 예뻤다. 탁 트인 초록의 들판에 노랗게 피어있는 유채 꽃, 이와 맞닿은 파란 하늘과 몽실몽실한 흰 구름이 꿈속 같은 풍경이었다.
바람 없이 따뜻하고 맑고 청아한 곳. 이런 곳에 집 한 채 지어놓고 살았으면 딱 좋겠다. 살리네라스는 원래 바다였는데, 지각변동으로 인해 융기가 일어나면서 산 중턱에 염전이 형성된 곳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내려가지는 못하고 위에서만 보았는데, 가까이 내려가 보았더라면 훨씬 실감이 났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핑크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라니 그 모습이 신기하고 예쁘기도 했을 텐데.
다음으로 들른 오이얀따이땀뽀(Ollantaytambo)는 스페인이 잉카제국을 침략했을 때의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서는 넓고 높은 계단을 끝도 없이 올라야 했는데, 계단 바로 오른편에 있던 산은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식물들은 마치 거미줄과 먼지가 엉킨 채 늘어져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모라이(Moray) 유적지에도 들렀는데, 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다랑이 밭’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을 한 잉카시대의 농업시험장이 있었다. 계단식으로 된 둥근 테라스들이 원형극장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제일 아래 가장 작은 원의 지름이 40~45미터이고, 가장 위에 있는 테라스까지의 높이는 69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계단 하나마다 빛과 바람의 방향을 조절함으로써 온도 차이가 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제일 아래부터 위까지의 온도 차는 15도라고 했다. 69미터 계단의 온도차 15도는, 일반적으로 해발 1,000미터의 온도 차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각 단마다 생기는 온도 차이를 이용해 그 온도에 맞는 각기 다른 작물을 재배했다고 하니, 그 발상과 기술이 정말 놀랍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해미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알려준 바로는, 기록이 없어서 그 구체적인 원리와 방법을 모른다고 한다. 잉카 문명이 그토록 화려했는데 이런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잉카인들에게는 문자가 없어서 읽고 쓰지를 못했다고 한다.
대신 그들은 노끈이나 매듭의 길이와 색깔 등으로 표시를 하는 결승 문자를 사용했다. 식물학, 의학, 건축학 등이 뛰어났던 그 문명에 문자가 없었다는 것이 내겐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잉카 문명이 꽃피었던 시기는 엄청난 고대였던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잉카제국이 역사 시대로 편입된 시기는 12세기였고,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멸망한 16세기 중반까지 번영기를 누렸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중기부터 조선왕조 초중기에 해당된다.
알고 보면 잉카문명의 신비를 논하기에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였을 수도 있다. 다만 문자로 된 기록이 남지 않았고 그 문명의 후속 이야기들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어서 더욱 신비하게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점심 뷔페식당도 마음에 들었다. 파비앙 여행사를 통해, 오늘 쿠스코에서부터 동행하게 된 해미와 정원 식탁에서 오랜만에 여유롭고 풍성한 점심을 먹었다. 푸르고 시원한 산이 마주 보이는 잔디정원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며 아주 좋았다. 다만 시간이 40분밖에 주어지지 않은 게 좀 아쉬웠다.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가 또 어딘가로 1시간 반 걸리는 곳에 간다고 했다. 해미는 우리가 이미 3개의 투어를 다 마쳤는데, 어디를 또 간다는 것인지 이상하다고 했다. 어리바리한 나는 어느새, 스페인어를 잘하는 해미에게만 의지하며 가이드가 하는 말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해미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4시 30분에 잉카 레일 기차를 타야 하잖아요. 곧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1시간 반 거리의 어디를 또 들른다고? 이건 좀 이상한데요.” 하며 해미가 불안해했다. 그러더니 우리 뒤에 탔던 커플이 안 보인다고, 아무래도 그들은 기차를 타러 간 것 같다고, 우리도 그랬어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가이드를 불러 사정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이미 전체 여행객들에게 공지했었다고, 식당에서 다른 버스로 갈아탔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일단 버스를 세우고 우리를 길 건너편으로 데리고 가서, 지나가는 버스에 손을 흔들어 세우더니 거기에 우리를 태웠다.
로컬 버스라 관광객은 없고 주변 마을에 사는 페루인들만 타고 있었다. 가이드가 기사에게 큰 소리로 우리의 행선지와 기차 시간을 말해주었기 때문에,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급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시골 어른들의 얼굴이 어쩌면 그렇게 순박하면서 귀여운지 자꾸 웃음이 났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위로와 응원의 표정을 보내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거의 기차 출발 시간이 다 되어갈 때에야 버스에서 내렸다. 우리더러 내리라고 말해준 맞은편 좌석의 아저씨는 우리보다 먼저 내려서, 뚝뚝을 불러 우리 행선지를 말해주더니 얼른 타라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뚝뚝 기사의 긴박한 임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통정리하는 경찰이 뚝뚝을 세우고 계속 맞은편 차를 먼저 보내자, 뚝뚝 기사는 창밖으로 얼굴과 손을 내밀어 경찰에게 어필을 해 보였다. 그러나 경찰에게 가볍게 무시당한 그는 운전대를 내려치며 낮게 소리쳤다.
"급하다고, 기차역에 가야 된다고!" 그는 경찰 귀에 들리지도 않는데 연거푸 외치고 있었다.
그 길이 뚫리고 한참 달리는데 또 체증이 시작되었다. 기사는 또 운전대를 두드려 댔다. 우리를 시간 안에 데려다주어야 했던 그는 우리 만큼이나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해미는 이제 좀 체념 상태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난 아니었다. 안 될 거라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았다.
드디어 역에 도착하자, 앞에 서있던 여자 직원이 우리가 탈 기차를 가리키며 서두르라고 했다. 난 냅다 전 속력으로 달렸다. 나중에 해미는 내 달리기 속도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렇게 겨우 타게 된 잉카 레일은 우리가 타자마자 바로 출발했고, 차가 움직이고 나서야 내 좌석을 찾아 앉은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뚝우뚝 솟은 산들 아래로 난 강에서는, 황톳빛의 성난 물살들이 서로 부딪치고 부서지며 흘러가고 있었다. 홍수가 난 듯한 급류와 역광에 반짝이는 커다란 억새꽃들, 산, 구름, 모든 것들이 너무나 스펙터클해서 가슴이 뛸 지경이었다.
그렇게 기차가 40-50 분쯤 달렸을까, 이제부터 분포 식물들과 기후가 달라진다고, 정글 지역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산을 보니 그냥 푸른색을 입힌 민둥산 같던 것들이 잎이 무성한 나무들로 채워지고, 급류가 흐르는 강 양편에도 나무들이 빽빽하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 가만히 앉아서 순식간에 기후대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1시간 30분 동안 잉카 레일을 타면서 마주하게 된 풍경은 그야말로 경외감마저 느끼게 했다.
아! 이 페루를 어쩔 것인가? 마추픽추가 아니더라도, 이 잉카 레일을 타는 것은 꼭 해봐야 할 투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