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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편안한 도시, 쿠스코(1)

- 쿠스코, 페루

by Annie


쿠스코행 버스 좌석은 2층 맨 앞자리라, 다리를 쭉 펴고 앉을 수 있어서 좋았다. 트인 시야로 야경을 보며 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다 금방 잠이 들기는 했다. 그렇게 아침까지 잘 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새벽 2시쯤 되었나? 추워지기 시작했다. 휴대용 가방에 늘 넣어두는 카디건과 경량 패딩을 꺼내려고 가방을 열어보니, 아무것도 없다. 별 수 없이 짧은 치마에 맨다리로 자야 할판이다. 버스에서 준 얇은 담요 한 장으로 몸을 꽁꽁 감싸 보았지만, 여전히 추워서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담요 한 장을 더 달라고 해야지 하고 1층으로 내려가 보았지만, 1층은 화장실과 객실만 보일 뿐 승무원 자리가 없었고 2층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돌아와 잠을 청해보다가, 목 베개처럼 베고 자던 청 반바지를 다리에 끼우고 그 위에 담요를 덮었다. 벗었던 양말과 신발은 진즉 다시 신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추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 다시 잠이 깼을 때는 6시가 좀 못 되어서였던 것 같다. 아직 어둑했다. 뜨는 해를 보고 싶어 그냥 그대로 깨어 있었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지며 바깥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탁 트인 앞자리에서 보이는 산악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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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의 정원은 아늑했고, 리셉셔니스트도 매우 친절했다. 부엌일을 하는 아줌마, 청소하는 아가씨도 너무 정겨워서 머무는 동안 서로 따뜻한 미소가 오갔다. 4인실 여성 전용 룸은, 천정 일부가 투명창이어서 자연 채광이 되었다.





쿠스코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린다. 그러나 짧으면 5분, 길면 20분 정도. 비가 그치고 나면 막 세수한 어린아이의 얼굴 같은 하늘과 구름, 건물들이 쨘 하고 등장한다. 모든 게 투명하게 반짝인다. 미세 먼지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수시로 빗물로 씻어대니.


페루의 고 성당들은 정말 아름답다. 엄청난 기교를 들인 것 같지도 않고 소박한데도, 선들이 우아하다. 벽면은 돌로 된 부분과 벽돌로 된 부분이 한 건물에 공존한다. 둘 모두 같은 빛깔이고, 모양과 패턴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고전적이다.

비가 자주 씻어내는 탓인지 깨끗한 느낌까지 더해진다. 초록 바탕에 커다란 금빛 징 같은 것들이 박혀 있는 아치형의 문은 주변의 벽면 색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주, 아름답다는 말 외의 다른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비가 내리면 그 빛깔은 보다 깊이 있고 신비로워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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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비가 내릴 때, 길 하나를 두고 그 성당이 마주 보이는 곳에 예쁜 카페가 있어서 들어갔다. 야외 테이블과 초록빛 철제 의자가 예뻤지만 추워서 안으로 들어가 창가에 앉았다. 비가 내리고 그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사람들, 카페, 성당, 성당의 문. 환상적이었다. 오늘도 나는 그곳에 갔다.


이 페스트리 카페는 내가 이 여행을 떠난 후로, 가본 중 가장 훌륭한 빵맛과 착한 가격을 자랑한다. 나비 파이 모양의 베리 파이가 3 솔, 엄청 큰 초코 크롸상이 2개에 4 솔, 커피가 6 솔 해서 총 13 솔(4천 원)이었다. 빵 두 개를 먹고 나면 엄청 배부르다. 초코 크롸상 한 개는 테이크 아웃했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리마에서부터 와라즈, 69 호수, 이곳 쿠스코까지 계속 마주쳤던 두나 커플과 또 길에서 또 마주쳤다. 나는 들고 있던 빵 봉지를 그들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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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쿠스코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는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두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고 정민만 남았는데, 그가 내 점심 값까지 내버렸다. 리마 호스텔에서 터미널 가는 택시비를 내주지 않았느냐며.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 비싸고 맛있는 것 사달라며. 점심 먹는 동안 난 그들에게 다음에 또 이렇게 마주치면 그때는 내가 밥을 사주겠노라고 했던 참이다.


두나는 나를 보는 순간엔 반가워하지만, 함께 엮여 다니는 것은 피하고 싶은 눈치다. 그 마음도 이해한다. 나라도 내가 남자 친구랑 알콩달콩 여행하는데, 나이 든 한국 여자가 거추장스럽게 끼어든다는 것이 반갑지는 않을 터이다.

다만 정민은 진심으로 나를 반가워하고 돕고 싶어 했다. 내일 마추픽추에 가는데 함께 가면 좋을 텐데 라고 말한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난 내일 볼리비아 비자를 신청하고 발급받아야 해서 못 간다고 했다. 그는 공고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발탁한 1년간의 호주 연수를 다녀온 후, 다시 호주에서 1년 동안 워킹 홀리데이로 머물며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꼭 가보고 싶었던 뉴욕에 들러서 갈 거라고 했다.

그는 점심을 먹은 후, 시간이 충분하다며 나를 파비앙 여행사까지 데려다주었다. 참 착한 청년이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망고, 사과, 아보카도를 하나씩 사고 1리터짜리 팩 와인을 샀다. 비가 와서 추운 호스텔은 거의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투숙객도 안 보이고, 낮에 볼 때는 근사했던 라운지도 어둡고 썰렁하다. 6인실인 내 룸엔 침대 하나만 누가 쓰고 있는 흔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인이지 싶다.


밤에 돌아온 룸메이트는 40대 초반 정도의 한국인이었는데 말하기를 좋아하는 이였다. 내가 와인 한 잔을 권해 함께 마시는 동안, 그녀는 한국인들이 많은 숙소에 갔더니 거기도 범죄가 있더라는 얘기, 이 도시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국 식당에 갔는데, 주인에게 실망했던 이야기 등을 세세하게 풀어놓았다. 한국 여행담인지 외국 여행담인지 모를 이런 얘기들을 들으며,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 그녀와 더 깊은 얘기는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어제 방문했던 마추픽추 여행사가 한국인 전문 여행사, ‘파비앙’이라 영 내키지 않았다. 숙소의 리셉션 가이에게 여행사를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파비앙’이 최고라고 한다. 마지못해 파비앙 앞에까지 가서도 머뭇거리고 서있는데, 마침 어제 정보 수집 차 들렀다가 얼굴을 익힌 상담사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한다. 나는 점심시간인가 싶어 머뭇거리는 중이었다고 둘러댔다. 그리고는 그냥 계약해버렸다.

242달러에 세금 80 솔. 꿈의 마추픽추이지만 비용이 30만 원이나 든다. 물론 하루는 주변 ‘성스러운 계곡’ 투어까지 포함한 가격이지만.


호스텔의 리셉션 가이, 공블리는 아침에 내 비자 서류 작성과 사진 업로드, 신용카드 업로드, 볼리비아 일정표 작성에 프린트까지 일체를 도맡아 해 주었다. 대사관까지 가는 택시도 불러주고, 비가 내리자 우산까지 빌려주었다. 그의 친절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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