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가지 얼굴의 페루
마추픽추 투어에서 돌아오는 길에, 호스텔 언덕바지에 ‘비스트로’라는 식당이 보여서 들어갔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해초와 버섯을 재료로 한 따끈한 수프인데, 라이스와 바나나 튀김이 함께 나왔다. 18 솔로 싸지는 않았다. 애피타이저로, 앙증맞은 접시에 미니 샐러드가 너무나 예쁘게 장식되어 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예쁘고 고급스러운 애피타이저에 기분이 급 좋아졌고, 이어서 나온 수프도 장식이 예술이었다. 맛도 아주 좋아서, 나는 별도로 나온 라이스를 한국식으로 수프에 말아서 남김없이 비웠다. 버섯과 야채가 많이 들어간 진국이었다. 맛과 장식, 서비스에 아주 만족한 나는 2 솔의 팁을 남기고 왔다.
내일 또 와야지. 내일은 오늘 포기했던 감자를 두른 아보카도 요리를 먹어봐야지.
다음날 호스텔의 조식을 먹으러 갔더니, 주방 아주머니가 파인애플을 잘게 잘라서 내 접시에 가득 부어 주었다. 그제 아침에 부엌에서 망고와 아보카도를 깎고 있다가 그녀와 마주쳤었다. 혼자 먹기에는 양도 많아서 그녀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너무나 선한 그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었다.
작은 바나나 두 개를 썰어 빵에 올리고, 그 위에 파인애플 조각들을 얹어 먹으니까, 밋밋한 빵도 맛이 그럴 듯 해진다.
오늘은 쿠스코 시내에서 하루 쉬는 날이다. 파비앙에 가서 투어 두 개를 예약하고, 내셔널 뱅크의 위치를 물어 그쪽으로 가보았다. 거기서는 페루 화폐인 '솔'이 수수료 없이 인출되는 곳인데, 굳이 솔이 더 필요하진 않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확인 차 간 것이다.
내셔널 뱅크 지역을 조금 돌아보다가, 어제 투어 밴에서 내린 곳이 그 근처였음을 알게 되었고, 내일 비니군카에서 돌아와 내릴 지점도 그곳일 거라 여겨져 다행이다 싶었다. 언덕 왼쪽으로 올라가니 뷰가 좋은 테라스 카페가 보여 들어갔다.
카푸치노와 치킨 파이를 시키고 테라스에 나가 앉았더니 역시 예상대로 뷰가 훌륭하다. 맞은편 오른쪽으로는 고풍스러운 어제의 그 성당이, 왼쪽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그리고 그 너머로는 붉은 벽돌로 된 주택 단지와 그것들을 둘러싼 산과 하늘, 구름이 보인다. 명당이다. 나 외에는 손님도 없이 한적해서 글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카페에서 3시간 정도 보낸 후 호스텔로 돌아오는 길에, 마사지를 받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에는 ‘마사지’를 외치는 호객꾼들이 넘쳐 났다. 전신 마사지 1시간에 30 솔인데, 난 얼굴 마사지를 추가했다. 합이 50 솔인데 깎아서 45 솔. 햇빛과 먼지에 과도하게 시달린 내 얼굴을 좀 호강시켜주고 싶었다.
마사지사는 한참을 걸어서 어느 집처럼 생긴 건물로 나를 데려갔다. 나란히 열쇠 채워진 문들이 보였고, 그녀는 그중 하나의 자물쇠를 따고 들어갔다. 호객하는 마사지사마다, 사용할 수 있는 룸이 하나씩 있는 모양이다. 안에 들어서니 침대 세 개에 제법 깨끗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마사지는 별 거 없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 하나는, 뜨겁게 달구어진 반들반들한 돌멩이 같은 것을 이용해 전신을 마사지하는 것이었다. 그게 좋았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듯했다.
이곳 남미는 그 어느 곳에서도 난방이라는 게 없다. 낮엔 더운 곳이 많지만 밤이 되면 어느 곳이나 서늘해져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스텔에 들어서면 따뜻한 난방이 그립다. 따뜻한 물 샤워를 하고 난 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던 차에 뜨거운 돌이 팔다리와 등허리를 훑고 지나가니,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평생 동안 전신 마사지를 받아본 건 두어 번 밖에 안 되지만, 그냥 생각만큼 시원하지도, 피로가 풀리는 느낌도 없었다. 그중 이 돌 마사지가 베스트인 것 같다.
얼굴 마사지는 그냥 클렌징에 팩만 한 번 했다. 클렌징이 잘 안된 것 같은데 그 위에다 팩만 한다고 해서 뭐 얼마나 도움이 되랴 싶었다. 45 솔로 깎았었지만 난 그냥 5 솔을 팁으로 주었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오르막길에서, 엊그제 내가 사진을 함께 찍었던 리마와 아낙이 보였다. 두 명의 어린아이들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리마를 한 마리 데리고 다니면서,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받고 있었다. 10 솔이라고 해서 나도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찍고 나서 보니 잔돈이 없었다. 내가 사정을 말하며 돌아오는 길에 주겠노라고 하자, 그러라면서도 조금 토라지는 얼굴이 귀여웠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 후로 그곳을 오갈 때마다, 둘러보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던 차에 이곳에서 그녀와 마주친 것이다. 난 반가움에 뛰어가서 내가 사진을 함께 찍었노라며, 폰 카메라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을 보여주고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물론 손짓, 몸짓으로 한 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는 아이들이 뭐라고 신나게 조잘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환하게 웃으며 15 솔을 주었다. 너무 다행이었다.
그리고는 호스텔에 가서 소지품을 두고, 전날 갔던 ‘비스트로’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맞은편에 앉아서 식사하던 남자가 내게 인사한다. 나도 등지고 앉지 않고 맞은편의 다른 테이블에 그를 마주하고 앉았다. 어쩐지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젊은이의 몸가짐이 좀 남달랐다. 그러고 보니 여긴 비건 레스토랑이었다. 남자 베지터리언은 보기 드물었는데.
그는 내일 시간이 나면 심리 치료 모임이 있는데, 참석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안타깝지만 난 내일 투어가 잡혀있고 모레는 푸노로 떠난다고 했다. 그는 내게 몇 마디 말을 더 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종교적이라고 해야 할까, 종교를 강요하는 사람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메뉴를 고를 때, 그는 라자냐를 추천했다. 'incredibly good'이라며.
그래서 야채 라자냐를 시켰는데 주인이 와서 음료는 뭘로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걸 오케이로 받아들였는지 티 메뉴를 가져왔다. 그는 나중에 티팟과 잔을 가져왔다. 이건 서비스일까? 그래 이 집 서비스가 좋지. 애피타이저는 무료로 나오고 친절하게 와서 설명해주고, 그러니까 어제 팁도 2 솔 남기고 왔지.
라자냐는 근사해 보였다. 양도 많았고. 어느 정도 먹다 보니 어제도 비슷한 재료의 해초 수프를 먹었는데, 또 그 야채들을 재료로 한 음식을 먹어서인지 갑자기 물렸다. 그만 먹고 싶어졌다. 그러나 25 솔 짜리 식사다. 난 거의 꾸역꾸역 먹다시피 하고도 삼분의 일을 남겼다. 이러면 기분이 안 좋아진다.
똑같은 식당은 처음에 아무리 좋았어도, 두 번 갈 일은 아닌 모양이다. 난 이 비스트로에서 좀 더 가벼운 것을 시켰어야 했다. 감자 도우에 아보카도를 올린, 약간 스낵 느낌이 나는. 그랬더라면 이 식당에 대해 여전히 좋은 인상을 가졌을 것이다. 게다가 25 솔에 티도 계산해서 29 솔의 청구서가 나오니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티는 서비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호스텔에 돌아와 씻고 나오는데 룸메이트가 들어온다. 룸메이트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초저녁부터 나란히 방에 앉아 있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고 좀 거북하다. 너무 조용해서 숨쉬기도, 움직이기도, 뭔가를 하기에도 많은 제약을 느낀다. 심지어 화장실을 한 번 더 가고 싶은데, 그것도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일찍 잤다.
11시쯤, 그리고 3시 반쯤 눈이 떠지더니, 5시 50분에 알람을 맞추어 두었는데도 계속 잠을 이루지 못했다. 투어 중에 컨디션이 괜찮을까? 룸메이트는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를 돌고 페루로 넘어왔다고 한다.
몇 달 동안 여행하다 보면 새로운 룸메이트나 여행자를 만나 말을 주고받는 것도 시들해지고, 호스텔에 돌아오면 그냥 자기 침대에서 이어폰을 끼고 앉아 영화도 보고 자기 시간을 갖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 이들이 주로 여성 전용 도미토리를 찾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