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가지 얼굴의 페루
오늘 갔던 비니쿤카(Vinicunca)는 너무 추웠다. 이 산은 일명 레인보우 마운틴이라고도 불리는데, 무지개처럼 겹겹이 여러 가지 빛깔을 하고 있어서이다. 맑고 화창한 날에는 그 빛깔이 더 밝고 화려하여 꿈같다고 하는데, 오늘은 비 내리고 안개 낀 날이었다.
산을 올라가는 길의 삼분의 이는 말을 탄 덕분에 쉬웠지만, 말에서 내린 지점부터는 경사가 급해져서 무척 힘들었다. 해발 5,000미터가 넘는 곳이라, 걸음을 떼기가 어렵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참이다. 몇 걸음 오르고 나면 금세 숨쉬기가 힘들어지지만 조금 쉬면 또 괜찮아져서, 그렇게 오르다 쉬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정작 정상 가까이 올랐을 때부터는 안개가 끼기 시작해서 제대로 경치를 볼 수가 없었다. 안개는 우박으로 변했고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며 바람도 심하게 불어서, 장갑이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래도 몇 초씩 안개가 걷힐 때 드러나는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다.
자연은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과 만나, 그때그때 거기에 맞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라, 꿈꾸었던 모습이 아니더라도 실망할 일은 아니다. 모차르트의 음악 같은 비니쿤카를 꿈꾸었으나, 비와 안개, 바람과 우박이라는 악단을 이끈 베토벤의 음악 같은 장엄한 모습이었으니.
안개가 잠깐 걷히면 여전히 흐리고 비가 내리는데도, 풍경이 너무 예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이래서 가이드들이 ‘바모스(빨리)’를 외쳐대나 보다. 그만 보고 빨리 가자고.
나는 버틸 만큼 버티다가 마지못해 내려온다. 옆으로 난 길도 아름다웠고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우리 투어 팀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내려오는 길은 분명 고도와 관계없이 걷기 쉬웠지만, 말 타고 올라올 때는 무척 짧게 느껴졌던 그 길이 멀고도 멀었다. 길 옆의 바위산들은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는 눈이 덮여있고, 아래로는 봄풀 같은 녹색의 이끼들로 덮여있었다.
아래 주차장에는 미니버스들이 몇 대 서있는데,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번호판을 확인하지 않고 내렸던 참이라, 어느 것이 내가 탈 버스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저기 아래쪽에 기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그렇게 버스를 숨겨 놓으면 어떻게 찾으라고. 내가 마지막이었나 보다. 내가 타자 버스는 곧 출발했다.
아침부터 옆자리에 앉아 동행했던 한국인 처자는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올라갔었다. 그녀는 알파카 사진을 찍으려고 풀밭으로 내려가다 엉덩방아를 찧어 슬라이딩하는 바람에, 바지와 속옷까지 홀랑 젖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때 찍은 사진을 보니까 그마저도 모두 추억일 것 같다고 했다. 비록 쿠스코로 돌아가는 내내 축축하고 추울 테지만.
통 성명도 안 한 그 처자는 30대 초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보통 한국인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9월에 여행을 떠났고 에쿠아도르에서 한 달 있느라, 예정되어있던 볼리비아에는 못 갔다고 한다. 그렇다. 남들 다 가는 곳에 가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그냥 마음이 더 가는 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느라, 다른 유명 여행지를 포기하는 것도 자유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에쿠아도르에 가고 싶어졌다. 왕복 100만 원 정도 하는 싼 티켓을 끊어서, 산과 바다, 도시 등 모든 것이 그 작은 나라 안에 다 있다는 에쿠아도르, 그리고 콜롬비아의 이피알레스와 칼리까지, 그리고 아마존 투어까지 해보는 것이다.
아마 그렇게 가라고, 이번 여행에서 그곳에 가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나 보다. 또 한 군데 갈 곳이 생겼네. 에쿠아도르는 달러를 쓰는 나라라 물가가 싸지는 않다고 했다. 바다 동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갈라파고스도 에쿠아도르에 있다고 한다. 아마 내년 겨울을 기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호스텔 야외 라운지에서 두 잔째의 와인이다. 감은 머리는 말린 데다, 패딩에 스웨터를 겹쳐 입고 수면 잠옷 바지까지 입고 있어서 덜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