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지칠 때

- 살타, 아르헨티나

by Annie



드디어 번아웃이 왔다. 호스텔을 나와 시내로 나갈 때는 가까웠는데, 시내에서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은 왜 이렇게 멀까. 고고학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올 때부터 이미 좀 지쳐있었다. 이래서 언제부터인가 여행 중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는 것을 꺼려한다. 들어갔다 나올 때면 늘 기진맥진 상태이다.


캐리어를 사려고 돌아다니며 너무 기운이 빠져서 어떻게든 회복을 해야 하는데, 마땅히 들어가 앉을 곳을 찾기가 힘들다. 캐리어 사는 것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아담한 케익 가게를 하나 발견해서 레몬 케익과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살타의 커피 맛은 좋다. 케익도 맛이 좋았다.


겨우 기운을 좀 차려서 걷다가 어떻게든 머리 염색을 해보려고 물었더니, 오후 7시에나 오라고 한다. 그래, 염색도 안 되는 모양이다. 캐리어도, 염색도 모두 멘도사로 넘기자. 도중에 뭐라도 먹고 기운을 좀 차려볼까 하는데, 호스텔 가는 길에 보아두었던 식당들이 너무 붐볐다.


역시 포기하고 호스텔로 돌아가 무작정 침대에 누웠다. 내가 나의 코 고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나는 깊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곳의 매트리스는 사람 몸을 쥐 나게 한다. 정말 거지 같은 호스텔이라고 욕이 나올 뻔했다. 하루라도 편안한 호텔에 묵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직 물가가 비싼 파타고니아,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이 남아서 돈 쓸 곳이 창창하다.


깊이 한숨 자고 일어나서 나와 보니 3시 30분쯤 되었다. 잠을 잘 못 자서 기진했던 것일까? 더위에 지쳤던 것일까? 지금 나가서 한 시간쯤 돌아다니면 다시 지칠까? 이 호스텔에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뭔가 기운을 돋우어줄만한 좋은 음식을 먹어야겠다.


그런데 식당은 모두 문을 닫고 저녁 8시에나 문을 연다고 한다. 카페만 문을 열었는데, 빵은 이제 그만 먹고 싶다. 식당을 찾다가 다시 지칠 판이다. 어쩔 수 없이 중심가의 피자 레스토랑에서 피자 반판을 시켜서 먹었다. 토핑으로 올라간 것은 하몽일까? 무지 짜다. 피자가 어찌나 짠지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콜라 한 병을 다 마시고, 간식으로 먹으려고 갖고 다니던 작은 초콜릿까지 터서 입가심으로 먹었다.


남은 피자는 싸가지고 가면 내가 먹을 것 같지는 않고, 다른 사람에게 먹으라고 싸갈까? 아니야. 그런 귀찮을 일은 만들지 말자. 주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 호스텔 주인 파블로도 친절한 척은 하지만, 그렇다고 편의를 봐주는 것도 없다. 안주인인 듯한 여자는 퉁명스럽고. 몸이 힘드니 마음도 강퍅해지나 보다.



1 (1).jpg



1 (5).jpg



1 (10).jpg



아르헨티나 여행 계획에서 늘 문제 되는 것이 멘도사다. 위치상으로 애매해서 그곳에 가려면 시간과 돈과 체력이 모두 많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멘도사라는 도시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나를 맞이해줄, 내가 따뜻하게 만나고 싶은 친구, 알바로와 산티아고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혼자 떠난 여행이지만, 동행다운 동행을 만나지 못한 채 그야말로 혼자가 되어 여행한 지 꽤 되었다. 사이사이 짧게, 나 같은 여행자를 만나 투어를 함께 하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짧은, 그리고 무심한 동행이었다. 그래서 정겨운 이들이 그립다. 멘도사에 가면 마음이 따뜻해질 것 같은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다.


멘도사에 가면 알바로와 산티아고를 따로 한 번씩 만나보고 싶다. 알바로에게는 와인에 대한 안내와 친절한 마음을, 산티아고에게는 심도 있고 광범위한 주제의 대화를 기대한다. 멘도사에서의 4일 중 이틀은 그렇게, 나머지 이틀은 혼자 탐험을 해보자.

그곳에서 염색도 하고 매일 와인을 마시자. 시내를 돌아보거나, 와이너리를 탐방하고, 마음에 맞는 이를 찾으면 함께 트레킹도 하고.


오늘 저녁은 호스텔이 조용하다. 낮에 아래 침대에 있던 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새로 온 옆 침대의 독일인은 이 조용한 호스텔이 적응하기 어려운가 보다. 내게 하루가 더 남아 있다면, 그리고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고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고, 지쳐서 아무 생각이 없다. 그래서 그저 의례적인 이야기만 몇 마디 주고받고는 휴대폰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 엄밀히 말하면 여행자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지기도 했다. 다들 엇비슷하므로. 함께 액티비티를 하거나, 아니면 데이빋과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주제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코드가 맞거나 하지 않으면 그냥 관심도 시들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여행에 임하는 내 마음가짐에 활력이 떨어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더욱 멘도사에 가고싶은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