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친구들이 있는 멘도사로

- 멘도사, 아르헨티나

by Annie



살타의 호스텔을 떠나는 날 아침에는 비가 내렸다. 우산도 캐리어 깊숙이 넣어두었는데 아직 어둑한 거리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 모든 짐을 끌고 메고 나설 일이 좀 심란했다. 호스텔에 손님이 몇 안 되어서 그러나? 어제 새 캐리어를 사서, 낡고 손잡이가 조금 부서진 캐리어를 주인인 파블로에게 주었는데 그 때문인지, 조식이 평소와 다르게 너무 훌륭했다.


사과 알갱이가 톡톡 씹히는 달콤한 조각 케익들, 씻은 통 사과, 커피와 오렌지 주스. 차분하게 앉아서 커피와 케익의 맛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난 사과 한 개와 케익 한 조각을 싸서 가방에 넣었다. 공항에 가면 커피에 곁들여 먹어야지.


공항 행 택시를 타고 도심을 벗어나 공항대로를 달린 후, 커피 향 가득한 공항 카페에 앉아 있으니 참 좋다. 매번 항공편으로만 이동했다면 이도 지겨웠겠지만, 몇 번의 야간 버스로 장거리를 이동한 후에 만나게 된 공항이 반갑고 편안하다.


멘도사에 도착하니 화창하고 쨍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어서 상쾌했다. 택시를 타고 호스텔로 갔는데 호스텔이 너무 좋다. 방안은 열린 덧문을 통해 잔디 정원이 보이고, 햇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하얀 침대보 깃에는 레이스 모양으로 수까지 놓여 있었다. 딸린 욕실도 창이 환하고 널찍하다. 너무 마음에 든다. 2박 예약했는데 아마 4박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냥 호스텔에서 한나절씩 시간 보내며 쉬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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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쯤 도착했기 때문에 아직 방 정리가 안 되기도 했지만, 난 먼저 멘도사 시내를 구경하고 싶었다. 가는 길에 현금 인출도 하려고 했는데, 가는 곳마다 인출 마지막 단계에서 내 카드로는 이용 불가하다는 안내가 뜬다. 현지인들은 되는데, 내 카드는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거리에 이렇게 은행이 많은 곳은 처음 본다. 한 블록에만도 은행이 서너 개씩은 됐다. 결국 포기하고 남은 돈을 확인해보니 300페소(6천 원)밖에 없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이미 500페소의 비싼 점심과, 염색에 600페소를 써버렸던 것이다.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서 미용실이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멀지 않다며 가는 길을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재차 “proxiz calle(다음 거리)?"라고 물었더니, 그가 그냥 나를 따라나선다. 자기 친구가 하는 미용실이란다. 그는 100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나와 함께 걸어서 그곳에 데려다주었다.

염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 식당을 지나다, 그와 다시 마주쳐서 이름을 물으니 ‘루이스’라고 했다. ‘루이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모두 친절한가 보다. 멕시코 시티의 지하철에서 만난 ‘루이스’가 떠올랐다.


계속 현금 인출에 실패하며 기운이 꺾이고 날도 덥고 해서, 시내 구경을 접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발을 씻고 앉아 그동안 눈팅만 하던 ‘남미 사랑’ 그룹 톡에 현금 인출에 대해 문의하는 글을 올렸다. 멘도사에 있다는 한국 청년에게서 답이 왔다. 방금 한 한국인에게 100달러 팔았다고, 내게도 100달러를 넘기겠다고, 스타벅스에 있으니 그리 오라고 했다.


아까 시내 거리를 걷다가 스타벅스를 보았던 참이라 찾아가기도 쉬웠다. 13만 원을 계좌 이체시킨 후 100달러를 인도받았다. 그러고는 그가 설명해준 대로, 거리에서 ‘깜비오’라고 외치는 사람을 따라가 환전을 했다. 7,300페소(146,000원)를 손에 넣으니 부자가 된 느낌이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돈을 쓸 게 아니라, 마트에서 장을 봐서 요리를 하려고 마트를 검색했다. 스테이크용 소고기 두덩이(220페소-4,400원), 오렌지 3개, 바나나 4개, 와인 1병(170페소-3천 원), 요거트 2개, 사과 3개, 미니 크롸상 한 팩을 총 850페소(17,000원)에 두둑이 사서 택시를 탔다. 택시비 80페소(1,800원). 참 착한 물가다.



1.jpg 포도주로 유명한 도시답게 거리에는 이런 포도주 빛깔의 분수대들이 여러 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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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의 리셉셔니스트, 난도가 내 스테이크 요리를 해주었다.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달군 후, 고기를 올리고 소금을 조금 뿌린다. 그리고 두어 번 뒤집으면 끝. 10분도 안 되어 완성된 스테이크는 천상의 맛이었다. 육즙 가득한, 먹어본 중 가장 훌륭한 육질과 맛이었다.

나는 와인을 터서 그에게 한 잔 따라주었다. 토마토 1개를 썰고 오렌지 1개를 까서 접시에 담으니, 훌륭한 저녁이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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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청년에게 와인을 권해 그와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고, 남은 와인과 미니 크롸쌍 한 팩은 호스텔 식구들과 나누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난도와 글쓰기, 책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베네수엘라에서 대학 교수였는데, 이곳의 대학에 교수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사설 학원의 강사직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난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칠레와 베네수엘라의 현 상황에도 관심이 갔다. 이 호스텔은 그냥 트레킹과 파티를 좋아하는 젊은이보다는 과타페의 멘도사 친구들처럼 조금은 나이 든 청년들, 그리고 그보다도 더 나이 든 여행자들이 있어서 이야기 나누는 것도 재미있었다.






어제저녁 식탁에서 와인을 함께 마시던 칠레 청년이 그랬다. 여기 아르헨티나에서는, 만날 약속을 정해놓고도 안 나타나거나 시간을 미루며 핑계를 대는 것이 보통이라고. 난 내 친구들, 알바로와 산티아고가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제 알바로는 산티아고와 나를 만나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중이라며, 내일 전화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난 오늘 눈뜨면서부터 지금까지 아무 스케줄을 만들지 않고 기다리는 중이다. 물론 하루를 이 호스텔의 편안함과 나른함 속에 맡겨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실제 그러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기약이 없지 않은가.


하긴 뭐 멘도사에 4일 묵는다 해도, 벌써 낼과 모레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는 와인 투어를 한다 치고. 그런데 와인 투어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는다. 그냥 알바로의 와인 농장을 둘러보고는 진짜 와인 마시는 일에나 시간을 투자하고 싶을 뿐.


이 호스텔 벽의 그림들은 누가 그렸을까? 좀 전에 새로운 룸메이트가 들어오기 전에 침대에 누워, 그리고 이후로는 바깥 해먹에 누워 잠시 조는 사이에, 나는 내 코 고는 소리를 짧게 들었다. 그 느낌이 좋다. 여행 중 그렇게 편안하게 좀 긴 낮잠을 자고 싶었는데.


이곳 멘도사는 한낮에는 무척 덥다. 지금 호스텔 정원의 그늘 벤치에 앉아 있는데, 마치 사우나 실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땀이 배어 나온다. 그러나 이 느낌도 좋다. 아마존 투어의 고요함과 휴식이 이와 비슷할까? 그쪽이 조금 덜 쾌적하고 조금 더 자연 친화적이긴 하겠지만.


이 덥고 약간 끈끈한 날씨는 추위에 옹송그려질 때와 달리, 꽤나 관능적인 느낌이다. 열대의 생명체들, 식물의 잎사귀도, 커다랗고 붉은 꽃도, 기어 다니는 곤충들, 모두들 조금씩 그런 분위기를 뿜어낸다.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이곳 주변의 구멍가게들은 주말이라 모두 문을 닫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와인도 두 병 사 오는 건데. 오늘 저녁엔 다시 스테이크를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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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크고 붉은 꽃들을 사진으로 찍으며 혼자 놀기를 하고 있는데, 산티아고에게서 연락이 왔다. 1시간 후에 알바로와 함께 나를 픽업하러 가도 되겠느냐고.

앗싸! 나는 빠른 샤워를 하고 후다닥 준비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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