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보여준 멘도사

- 시내 투어와 알바로 집에서의 바비큐 파티, 아르헨티나

by Annie



산티아고가 나를 픽업해서 알바로 집으로 함께 갔다. 알바로의 집은 꽤 큰 저택이었다. 육중한 대문을 열자 잔디밭과 큰 나무들이 보이고, 사자처럼 둥근 갈기를 가진 갈색 개 한 마리가 엉금엉금 다가온다. 알바로는 언제 봐도 정겹다. 그냥 어지간한 것은 다 감싸줄 것 같은 사람이다.


뒤뜰로 향하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더 큰 잔디밭과 수영장, 그 옆에 커다란 종려나무, 가장자리를 돌며 그늘을 만들고 있는 큰 나무들, 그네, 커다란 탁자와 의자들, 그리고 수영장 옆에는 바비큐 설비가 야외 싱크대처럼 길게 설치되어 있었다.


알바로의 동생 훌리아는 수영복을 입은 채 수영장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또 한 명의 여동생, 캐롤리나가 있었다. 와이너리와 몇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이미 들었기 때문에 사는 형편이 괜찮으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산티아고의 말에 의하면 시내에 이렇게 큰 집을 가지려면 지금은 엄청난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알바로는 집안 냉장고에서 고기와 맥주, 와인 등을 가져와 바비큐 설비 옆의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내게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알바로의 지프를 타고 시내 투어에 나섰다. 인디펜던트 플라자와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산 마틴 거리보다 더 세련된 거리를 지나갔다.


새로운 거리나 장소를 만날 때마다, 알바로는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열심히 내게 설명해주었다. 그의 영어는 몹시 느리다. 사분의 일 배속 정도 된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심지어 운전대에서 두 손을 떼고 고개를 돌려, 뒷좌석의 나를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가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옆에 앉은 산티아고가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이 친구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나처럼 게으른 여행자가 멘도사라는 도시를 이렇게 돌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언덕을 올라가 차를 주차하고, 정상의 커다란 기념비 앞까지 조금 걸어갔다. 기념비는 크고, 높고, 역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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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침략과 식민 지배로부터, 그 구속의 사슬을 힘차게 끊어버리는 아르헨티나인들의 당당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남미를 상징하는 새, 콘돌과 사람들이 360도로 돌아가며 조각되어 있었다. 그 조각의 장면 장면들을 알바로와 산티아고가 번갈아가며 설명해주었다.

여행의 어느 순간부터 내가 여행하는 장소, 그 나라의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참에, 가이드가 아닌 친구들의 설명이라 나는 더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존경받는 장군이 페루와 볼리비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두 나라는 이를 몹시 고마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연중 어느 시기가 되면, 진심과 존경을 담은 기념품들을 들고 성지 순례하듯이 아르헨티나를 찾아온다. 그들은 형제의 나라와 같다고 한다.

원래 볼리비아는 페루와 한 민족, 한 국가였는데 칠레와의 전쟁에 패해서 바다를 잃은 작은 내륙 국가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부조에는 실존인물인 한 귀부인이 부인들을 상대로 아르헨티나 군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하고, 여인네들은 자신들의 귀금속을 기꺼이 내놓는 장면이 있다. 어떤 노예들은 전쟁에 이기면 해방시켜주겠다는 장군의 약속에 따라, 자유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고 한다.

또 각기 다른 장소에서 출발한 군대들이 어느 한 장소에 동시에 도착해서, 힘을 모아 적에 대항하기로 했는데, 동시에 도착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웠던 전술이었음에도 그들은 성공했고, 그 장면을 묘사하는 부조도 있었다. 여인들은 군복을 만들고, 장인들은 무기를 만들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온 국민이 함께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구조물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산속 같은 언덕 아래, 그리스의 야외극장 같은 둥근 무대가 있었고, 다음 주 주말에는 그곳에서 포도 수확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알바로는 내게 그곳을 보여주고 싶어 굳이 차를 몰고 그쪽으로 내려갔지만, 그곳은 축제를 위한 무대 설치와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다. 음향 효과가 좋아서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은 음질이 매우 풍부하고 좋았다.


돌아갈 때는 좀 전에 지나쳐왔던 멘도사의 시립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그 크기와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설계사에게 의뢰해서 디자인한 공원으로, 프랑스식이 아닌 영국식에 가까운 공원이라고 했다. 영국식 공원은 내가 런던에서 음악회를 보기 위해 앨버트 홀에 갔을 때, 근처에 있던 켄싱턴 공원을 봐서 안다. 프랑스식 공원이 나무 하나하나를 다듬어 매우 인공적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영국식 공원은 그냥 큰 나무들과 잔디와 풀과 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사람들은 조깅도 하고 가족들이 나들이도 나오고 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그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거대한 데다,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 저녁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조깅을 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너무나 여유로워 보인다. 연인이나 친구들끼리, 혹은 가족들끼리 더위를 피해 나와서, 돗자리나 간이 의자를 펴놓고 앉아 즐기는 곳, 그야말로 온 시민들이 늦은 밤까지 즐기는 거대한 휴식의 공간이었다.

그 끝도 안 보이는 큰 공원에서, 어두운 밤 시간에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습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주변의 불빛이 그림 자진 커다란 인공 호수도 있는데, 그곳에서는 카약이나 보트 타기를 즐기기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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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도사에서 또 하나 자랑할 만한 것은 거리마다 우거진채, 거의 터널을 이루고 있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이다. 멘도사는 원래 사막이었다. 넓은 차도 양쪽으로, 차도의 2배는 더 넓은 인도가 있는데, 또 그 인도 안쪽에는 인도와 평행으로 나있는, 시멘트 포장도로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가로수에 물을 공급하는 관개 시설이다.


어제 멘도사의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중심가까지 무려 8~10블록이나 되는 길을 걸어가야 했는데, 한낮의 땡볕 아래서도 더운 줄을 몰랐다. 그 넓은 인도가 아름드리 가로수들의 큰 그늘로 덮여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도시 같으면, 그 온도 아래서 그 정도 먼 길을 걷는다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곳 멘도사에서는 그 땡볕에 그 먼 길을 걷는데도 문제가 없었다. 나무들이 우거져 넓은 인도뿐 아니라 차도까지 양쪽에서 아치 모양으로 덮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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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들을 설명해주면서 알바로의 얼굴에는 멘도사에 대한, 아르헨티나에 대한 긍지가 넘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1920년대까지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경제 강국이었다. 그러나 쿠데타 등의 불안한 정치상황이 계속되고, 한때 정부의 잘못된 복지와 팝퓰리즘 정책때문에, 장기적인 침체에 빠져들었다.


봉급생활자들은 임금의 40퍼센트를 세금으로 내고, 알바로 같은 자영업자들은 50퍼센트 가까운 세금을 낸다고 한다. 그 세금으로 물론 전 국민이 대학까지 무료에 가까운 교육을 받고 무료 의료 혜택을 받고는 있지만, 그런 시스템이 지금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세금을 낸 만큼 좋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세금을 내기만 할 뿐, 그에 상응하는 혜택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반면 일부 빈곤층은 정부가 주는 돈으로 이 모든 혜택을 누리기만 할 뿐, 어떤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의지도 없다고 한다.

게다가 2년 전에 현 정부가 집권하면서, 더욱 커진 불안감 때문에 디플레이션은 더 심화되는 중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르헨티나 여행 정보를 검색하면서 보니까 불과 2-3년 전에 포스팅된 기사들을 보면 이곳 물가가 비싸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 이곳에 와서 체감하게 된 싼 물가는 그 2-3년 새에 크게 떨어진 아르헨티나의 화폐 가치 때문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페소의 가치는 계속 급락 중이어서 현지인들은 현금을 페소가 아닌 미국 달러로 쌓아둔다고 한다. 사회주의 이론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럴 리가 없을 텐데 라는 생각을 이곳 남미 여행을 하면서 많이 해본다. 호스텔 리셉셔니스트로 일하는 난도의 말에 의하면,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이 바닥모를 경기침체 상황에서 몹시 힘들어하고 있다.


그러나 알바로는 부유한 사업가이고, 산티아고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그리고 알바로의 여동생 줄리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노르웨이계 회사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중 상류층의 사람들이다. 다만 지나간 시절의 호황에 못 미치는 현재의 디플레이션 상태에 대해 불평하는 것일 뿐, 그들은 그래도 여전히 살만한 사람들이다. 여전히 수영장과 바비큐 데크가 딸린 중심가의 대 저택에 살고 있는.

사실 화장실을 가려고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집이 너무 커서 길을 잃을 것 같다고 하자 줄리아가 밖에서 기다려주겠다고 했을 정도다.


한국에 돌아가면 검색해서 알아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보통 다른 곳을 여행할 때는 여행지에 대한 이런 유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게 여행은 그저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 가슴이 탁 트이는 자유로움, 미지의 세계와 모험과의 조우,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 이런 것들이었다. 내가 가는 곳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앞으로의 여행에는 추가 항목이 될 것 같다.


시내 구경에서 돌아와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바비큐 파티를 시작했다. 알바로의 동생 줄리아와 알바로의 친구 커플도 합류했다. 먼저 3가지 종류의 맥주를 시음해보았다. 그리고 역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알바로의 여동생, 캐롤리나가 만든 와인과 다른 몇 가지 종류의 와인을 차례로 맛보았다.


맥주든 와인이든 그냥 주어진 대로 마시는 나는 맛의 호사가는 아니어서, 와인 맛에 대해 특별한 기억은 없다. 다만 내게 최선의 것을 보여주고 맛보게 해 주려는 그들의 노력에 감사하며 눈으로, 그리고 유쾌한 분위기로 그 호사를 즐겼다.

콜롬비아의 과타페에서 그랬듯이 알바로가 바비큐 요리를 도맡아 했다. 그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일상처럼 쉽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과타페와 달랐던 것은 바비큐한 양고기가 너무나 부드럽고 맛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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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즐겁고 맛있는 바비큐 파티였다. 파티가 끝나고 친구 커플의 매트리스를 어디론가 옮겨주어야 한다고 해서 차를 타고 가는데 마치 2차로 어디 놀러 가는 기분이었다. 얼큰하게 취한 나는 이것도 너무 재미있어서 들뜬 목소리로 뭐라 뭐라 종알거렸던 기억이 있다. 집을 나서는 길에 알바로의 엄마와 마주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즐거운 밤을 보내고는 산티아고가 나를 호스텔까지 데려다주었다.


독일에 살고 있는, 아직 여행 중이어서 이곳에는 없는 또 한 명의 친구, 에밀리오는 내가 아르헨티나 오기 전에 메시지를 보냈었다. 혹시 멘도사에 가거든 알바로와 산티아고에게 연락하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그들은 진심으로 너를 환영해줄 거라고. 그의 말이 내게 더 용기를 주기도 했었는데, 너무 맞는 말이었다. 아! 정겨운 나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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